이관순의 손편지[16]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생긴 일입니다. 여성교양과 1학년 강의실에는 첫 시간부터 교탁 위에 음료 캔을 올려놓는 학생이 있었지요. 학기 초는 가끔 있는 일이라 단순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한 번은 강의를 마치고 “누가 이런 수고를 하지?” 학생들을 향해 물었지만 반응이 없더군요. 그 후로는 묻지 않았습니다. 익명으로 하게 두면 중단도 쉬울 테니까. 하지만 매 시간마다 캔 음료는 정확한 위치에 놓여 졌고, 가려진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날 즈음 짐작이 가는 학생이 떠올랐지요. 강의실에 일찍 나와 두 번째 앞줄 중앙에 앉는 여학생. 유난히 큰 눈을 바로 뜨고 수업태도가 진지한 진희를 지목했습니다. 처음부터 눈망울이 참 선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매 번 그 성의를 고마워했습니다. 무엇보다 학기 16주 동안 한결같이 한 자리를, 한 자세로 지키는 것이 가상했습니다. 그즈음 나는 개인사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던 때입니다.
학기 후반에 들면서 이상해진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강의실에 들어가 그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면 헝클어진 감정이 풀리면서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겁니다. 왜 이렇지? 의문이 계속 따라왔습니다.
학기가 끝날 무렵일 때 비로소 의문이 풀렸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고, 사람이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성경구절처럼, 선한 친구를 사귀면 그 선함을 닮고, 마음에 평안이 있는 사람은 평안을 전한다고요. 비로소 사람의 마음도 전염이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해줄까? 묘하다는 생각을 하다 찾은 답입니다. 진희의 선한 눈망울과 호수같이 고요한 마음이 내게 옮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종강이 되었고 기말시험 기간으로 이어지다보니 얼굴도 못 보고 방학을 맞았습니다.
밥이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아쉬웠지요. 진희도 할 일을 마친 학생처럼 스르르 내 눈에서 멀어졌습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꽃처럼, 향기만 내고 떠나간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걸 그때 더 느꼈지요. .
늦은 오후, 학생들이 빠져나간 빈 교정을 내려 보다가 학생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열린 창으로 담벼락에 붉게 핀 넝쿨장미가 가득 차보일 때, 불현듯 내게 이번 학기의 주인공은 진희였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사람 셋이 길을 가도 그중에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진희가 이번 학기에 내 마음의 얼룩을 닦아준 Peaceful Leader였구나...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의 선한 눈망울과 고운 미소가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한 학기를 그냥 보낸 게 아니라는 생각에 작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슬그머니 노트북을 끌어당겨 메일을 열었습니다.
“진희야, 뜻밖의 메일에 놀라는 건 아니지? 학기가 잘 끝났다는 마음으로, 텅 빈 캠퍼스를 내려 보다가 학기 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단다. 그 누구도 음료 캔에 대해 말 하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한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끝까지 가더구나. 쉽지 않은 일을 했다.
그래,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 강의 들으랴, 음료 준비하랴... 네가 준비한 음료를 마실 때마다 쟨 얼마나 마음결이 고울까를 생각했다. 신기한 것은 그러다 내 마음까지 부드러워짐을 느꼈단다. 진희는 너의 선한 마음을 내게 감염시킨 바이러스였나 보다. 고운 마음 옮겨줘서 고맙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선한 마음을 옮기는 균주가 돼주렴.
작은 일에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엔 덤덤할 때가 많지. 항상 작은 것에 감동하고 사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자.
우리는 슬퍼서 울기도 하지만, 울다가 슬퍼지는 경우를 경험하지 않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래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말자. 내 삶에 온통 감사해야 할 조건으로 차 있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너의 선한 눈과 따뜻한 마음을 오래 기억하겠다 진희란 이름과 함께. 길지 않은 학창생활이다. 부디 넓게 크게 원을 그리며 잡종적 사고로 살아라. 중심에 안주하지 말고 경계에 서서 긴장하며 도전하는 젊음을 살아라. 더욱 성숙해진 2학기의 진희를 기대하며... God bless you!“
꽤 오래된 기억입니다. 텅 빈 캠퍼스에 흔들리던 세월의 물결을 추억하면서,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쌓이는 것임을 되새김질합니다. 기억은 늘 생물처럼 깨어난다는 것과 함께. 진희는 지금쯤 학부모가 됐겠다는 생각도하면서.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