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18-1]
모파상은 소설 ‘여자의 일생’에서 잘못된 만남이 만드는 가정의 비극을
그렸습니다. 귀족의 외동딸로 곱게 자란 잔은 결혼하지만, 첫날밤 남편이
보인 야수성에 환멸을 느끼고 맙니다.
남편은 하녀에게 아이를 낳게 하고, 백작부인과 간통하더니, 끝내는
백작에 의해 살해됩니다. 잔은 남은 아들에게 기대를 걸지만
아들마저 탕아가 돼 그녀 곁을 떠나는.
인생의 사무치는 애수와 시정이 짙은 작품입니다.
사람이 사는 집(house)과 가정(home)은 서로 기대며 살아갑니다.
‘사람人’ 자는 사람과 사람이, 집과 가정이 서로가 기대며 깃들어 사는
관계로 형상화했습니다.
집은 가정에 안식처를 제공하는 대신 가정은 집에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되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집이 하드웨어라면, 소프트웨어는 가정입니다. 집과 가정을 쌍태라 함도
집과 가정을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관계 때문이겠지요.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운 멋진 정치인이 있습니다. 미국 공화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2018년 돌연 은퇴를 선언해
주위를 놀라게 했지요.
15년 동안 매 주말마다 워싱턴에서 1300km 떨어진 집을 찾아 가족과
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별사에서 “더 늦기 전에 내가 돌아갈
곳은 가정이고 그때가 지금”이라는 귀거래사를 남겼죠.
메이어 영국 총리도 비슷한 말을 남기고 가정으로 향했습니다. 절정의
정치 가도를 달리던 호주의 존 키 총리도 중도에 하차했습니다.
“그동안 가정이 정치에 많은 걸 희생했는데, 이젠 정치가 가정에 희생할
차례”라는 초연한 은퇴 선언으로 박수를 받았습니다.
출발도 가정이고 마지막 기착지도 가정입니다. 많은 귀거래사 가운데
가정보다 고결한 것은 없습니다. “집은 곧 모든 것이야. 당신이 있는
곳이 내 보금자리야."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나온 명대사도 가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미국인이 애창하는 노래 ‘홈 스위트 홈’을 작사한 하워드 패튼은
노랫말을 쓴 후 말하길 집보다 소중한 것은 이 땅에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던
고향집을 찾지 못한 채 유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집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구석기의 동굴로 시작해 움집이
생겨나고, 농사를 짓게 되자 불을 지키고 곡식을 쌓아둘 곳이 필요해
지면서 갈수록 공간의 필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욕구가 점차 안정된 주거형태로 발전하고 개선되면서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지상 낙원에 이르게 되지요. 우리말 중에 가정을
뜻하는 ‘보금자리’만큼 안락함과 평안을 주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 보금자리가 언제부터 ‘부동산’으로 둔갑했습니다. 어젯밤 전철에서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의 다짐을 엿들었지요. “절대 지하철 2호선은
벗어나지 말자.” ‘절대’란 결기에서 부동산의 괴력을 느낍니다.
한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라고 한 아파트 광고가
경구처럼 들린 뒤로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정부는 때마다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고, 시민은 그 대책을 좇느라
영일이 없게 되었죠.
그렇다 보니 모두가 ‘집’이라 쓰고 ‘부동산’으로 읽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됐습니다. 수년 전, 영국의 유수 잡지사가 설문조사를 통해 ‘가정’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가정은 투쟁이 없는 세계요
큰 자가 작은 자가 되는 곳.
아버지의 왕국이고,
어머니의 세계요,
자식들의 낙원인 곳.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곳,
허물과 실패를 사랑으로
숨겨주는 곳입니다.”
하지만 집이 부동산이 된 우리 사회에서는 보금자리란 말은 허상이 되고
공허할 뿐입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필생의 과업처럼 되었고,
그 희망마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되묻게 됩니다.
집은 ‘사는 곳(home)’인가? ‘사는 것(buying)’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