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의시작

이관순의 손편지[18-6]

by 이관순

11월은 가려진 달입니다. 앞뒤로 개성이 강한 두 달 사이에 끼어 쓸쓸한

이미지를 내지만, 11월만큼 주부들 마음이 바빠지는 때도 없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김장과 수능이라는 넘어야 할 두 개의 큰 허들 때문이죠.


주부의 절반이 김장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11월이 되면 집집의

걱정은 누가 뭐래도 김장입니다. 담그든, 얻어먹든, 사 먹든 김장 김치라는

것을 맛봐야 겨울나기가 정서적으로 편해지니까요.


언젠가부터 김장과 수능이 가을과 겨울을 나누는 기준이 됐습니다. 수능

아침만 되면 뚝 떨어지는 수은주, 멀쩡하던 날도 김장하는 날이 되면

찬바람이 부는, 기막힌 조화를 공유합니다.


고생은 해도 일단 김장을 마치면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지요.

예부터 김장은 입동(11월 7일) 전후로 하는 것이 제 맛을 낸다고 해요.

1960-7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월동준비로 김장김치 200포기, 연탄

200장이 기본이었습니다.


동면을 준비하는 동물처럼 사람에게도 겨울나기가 그만큼 힘들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요. 마늘 까서 찧고, 쪽파 씻어 썰고, 생강 씻어 다지고,

찹쌀 풀 쑤고, 무 쓸어 채 만들다 보면 녹초가 됩니다.


김장은 사실 준비 과정이 전부라고 할 만큼 많은 공을 들여야 합니다.

이에 비하면 속 넣는 일은 노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여럿이

모여 힘든 일을 할 때는 양념처럼 우스갯소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김장철에 귀동냥한 얘깁니다. 독학으로 춤 공부를 끝낸 여자가

있었습니다. 주말에 김장도 담가놨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실전을 위해

용기를 내어 카바레에 갔답니다.


난생처음 낯선 남자 파트너에 안겨 춤을 추다 보니 긴장이 될 수밖에요.

자꾸 스텝이 꼬입니다. 남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귀에 대고 묻습니다.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그러자 여자가 금세 “네, 40포기 했어요.”

그 말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한 수험생은 책상 위에 이런 글을 써

붙였다고 해서 또 웃습니다.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다”라고.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김장은 수고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주부들에게는

여전히 가을철 대사(大事)입니다. 겨우내 가족 식탁을 지켜낼 우리 집

만능 찬이기 때문입니다.


김장하는 날 온 가족이 즐겨 먹는 것이 수육입니다. 바로 삶아낸 고기를

양념 듬뿍한 겉절이로 말아 입안에 넣을 때의 환함, 그리 멀지도 않은

푸근했던 세월이 눈앞에 하늘거립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 앞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추억을 만들 때는

이승을 떠나신 할머니도 엄마도 다 오십니다. 쉽게 3 ․ 4대가 어울리는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추석에 좋지 않은 일로 헤어졌던 시누이와 올케도, 큼직하게 보쌈을 싸

입에 넣어주며 “미안해.” 그 한 마디에 우린 천성이 가족임을 확인합니다.

지금도 시골에선 품앗이 김장을 통해 농사철에 생긴 앙금을 씻어내죠.


김치는 변수가 많은 음식입니다. 배추, 젓갈, 고춧가루, 속의 배합비율에

따라 김치 종류가 달라지니까요. 김치도 맛을 좌우하는 것은 ‘간’입니다.

배추의 절임 간, 양념 간이 고루 섞여 김치의 간을 완성합니다.


절임음식은 다른 문화권에도 흔하지만 ‘김장’처럼 겨울을 앞두고 국민적

행사로 김치를 담가 저장하는 풍속은 특별합니다. 이로 인해 김치문화가

2013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지요.


공교롭게 김장하기 전날, 자연유치원에 다니는 손자 손녀가 배추 한 포기

씩을 받아 들고 왔습니다. 김장 학습이라는 안내문과 같이. 그중 4분의 1

쪽을 절여 가면 유치원에서 함께 담근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오늘 저녁엔 집에서 담근 김치와 아이들이 만든 김치가 밥상에

함께 올라와 가족들 입맛을 즐겁게 했지요. 김장은 아내에게는 긴 겨울의

시작이지만, 아이들에겐 또 다른 추억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족이 단출해지면서 쉽게 김장을 담글 수 있도록 김장 재료가 들어있는

‘김장 카트’가 등장했습니다. 절임배추와 깔끔하게 포장된 양념을 배달해

주니 집에서는 버무리기만 하면 됩니다.


바야흐로 ‘포장 김치 전성시대’입니다. 김치 브랜드의 원조인 ‘종갓집’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생겨난 후 세계 최초로 포장 김치 시대를

열었지요. 포기김치를 비롯 맛김치, 별미김치, CAN김치, PET김치까지

내가 아는 것만도 이 정도입니다.


포장김치 예찬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김장이란 과도한 가사노동을

해결해 주고 언제 어디서나 인간을 케어하는, 세기의 발명품이라고!!

마치 50년 전 세탁기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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