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18-7]
어김없이 올해도 설날은 찾아왔고, 3대가 둘러앉은 가족들 앞에 떡국
한 그릇씩이 놓였습니다. 떡국을 먹음으로 나도, 아들도, 손자들 모두
미뤄져 온 나이를 한 살씩 온전히 먹게 되었지요.
아이들은 손가락을 꼽으며 한 살 더 먹은 기쁨을 자축하기에 흥이 났고,
아들 내외는 제 나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고, 아내는 올해로
끝날 60대를 반추합니다.
떡국을 먹을 때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는 젊음이
한창인 아들에게 떡국을 드시면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한 살 더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라고. 그때는 도덕 책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쯤으로 건너 들은 글귀입니다.
어느 해 설 아침,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고 내 나이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부모님 생전시엔 아들과 나이 차가 늘 똑같아서 두 분은
늘 어른이셨고 난 여린 아들이었는데, 떠나신 뒤로는 매년 한 살씩
부모님 나이를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설, 갑자기 어머니 나이에 근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머니와 동갑이 되던 설날 아침에, 목이 잠겨 떡국 한
그릇을 먹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지금의 내 나이보다 10년 아래셨던 어머니는 아들 사업이 힘든
것을 알고 파트타임으로 식당 주방 일을 나가셨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설날 어머니가 대학에 합격한 손자 세배를 기뻐 받으시고 1년 치
등록금을 담은 봉투를 쥐어줄 때서야 그간 사정을 알게 되었지요. 아들
합격 소식에 기쁨도 잠시, 등록금 마련에 한숨을 쉬던 때였죠.
덕분에 아들은 대학에 들어갔으나, 그때 얻은 허리병과 낙상 사고가
겹치면서 어머니는 마지막 2년을 누워 고생하시다 눈을 감으셨습니다.
이후로 설이 오면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고, 손자도 할머니 사랑을
잊지 못했지요.
그러다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보다 내
나이가 더 많은 지금 어머니처럼 손자들을 위해 그런 헌신을
해낼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머니는 하늘 같이 높은 분이시고 나는
여린 어머니의 아들일 뿐입니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도 나는 어머니의
그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다른 설날 아침, 떡국 한 그릇을 비우면서 눈이 욱신 거렸습니다.
태산준령만큼이나 높아 보이던 아버지의 그 나이에 근접한 자신을 알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 나이가
쉰 살이 되던 해 겨울밤, 고열로 쓰러진 아들을 살리려고 고희를 훌쩍
넘기신 분이 눈 내리는 산길을 걸어 읍내에서 약방을 운영하는 외삼촌
댁을 찾아 나섰습니다.
홀로 남은 아내만 어쩔 줄을 몰라했지요. 집에는 체온이 39도를
넘나드는 남편이 벌겋게 익어 있고, 눈구덩이에 약을 구하러 떠나신
시아버지는 자정이 되는데도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가슴 조이던 새벽 두 시, 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가 약을 구해 가슴에
품고 오셨습니다. 50대 아들을 구하려는 일심으로 늙으신 아버지가
눈 덮인 20리 산길을 걸어갔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 담력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느새
아버지의 그 나이를 바라보게 된 아들이 생각에 잠깁니다. 나도 아들을
위해 그러한 헌신을 할 수 있을까? 물으면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떡국을 먹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한 살 더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이 돼야
한다는 것. 아버지의 당부가 무엇을 뜻하는지 딱히 이것이라고 짚지는
못해도 어렴풋 잡히는 것은 있습니다.
올 설날 아침에, 온 가족이 함께 떡국을 나누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그저 나이만
먹으면 헛똑똑이가 된다고, 손자와 손녀에게 당부했습니다.
아버지가 생시에 내게 하시던 그 말법 그대로 써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