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49]
아저씨의 편지를 받아 간직한 지 어느새 3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봉투와 편지지 모두 누렇게 색이 바래버린 편지를 지금까지 지니게
된 사연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오릅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학교에서 국군 장병 아저씨들을 위로하기 위해
위문편지를 쓰게 했었지요. 겨울방학을 앞두고 의례적인 행사로 써서
보내는 것이지만 매 번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썼습니다.
6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해 학교에 갔는데, 뜻밖의 편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어요. 보낸 지 한 달이 넘은 일이라 까맣게
잊었는데 난생처음 내 이름으로 편지란 걸 받게 된 것입니다.
봉투에는 우표 대신 군사우편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어요.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강원도 화천에서 근무하던 나재현 병장 아저씨였습니다.
화천이 휴전선에서 가까운 최전방이라는 것도 그래서 알게 되었지요.
아저씨는 ‘꼬마숙녀 래미 양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부르면 ‘현재’라고 소개했어요. 어린 꼬마 소녀가 서툰 글씨로
눌러쓴 편지를 받아보고 정성스럽게 답장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서 꼬마 숙녀 이름을 거꾸로 부르면 재미있을 거라면서 나를
‘미래’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현재’와 ‘미래’의 만남이니
의미 있고 얼마나 멋지냐고 했어요.
해석이 너무 재미있어 혼자 깔깔 웃었답니다. 친구도 엄마도 편지를
보여주자 “재밌다” “성격 좋겠다. 며 함께 웃었지요. 이름을 쉽게 잊지
못하게 풀어준 그 재치와 유머가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어요.
편지를 보내준 아저씨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다가왔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는 생각에 어른이 다 된
것처럼 살짝 들뜨기도 했었지요.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남자 친구들이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났어요. 나재현 아니 나현재 아저씨는 지금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뜬금없는 생각이 든 거예요. 아마도 아저씨는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을 거야.
더구나 꼬마 소녀가 성년이 되도록 자신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마음이 한가할 때, 1년에 한 번은 소중히
간직해 둔 어린 시절의 추억 뭉치가 담긴 파일을 꺼냅니다. 그곳에
그 편지도 있어요.
어린 시절의 맑고 깨끗한 동심의 얼굴이 떠올라 좋고, 멀어져 간 날들이
살포시 고개를 흔들어주니 반갑습니다. 태어나 처음 받은 이성 편지,
감미로운 미소를 짓게 한 편지의 추억이 아련하고 그립기도 합니다.
어느 하늘 아래에서인가 소박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고 계실
나현재 병장 아저씨. 편지라고 써 본 지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지금,
다시 편지를 쓰라면 어린 시절 그 고운 마음을 살려낼 수 있을까?
정서는 메마르고 두근대던 가슴도 다 망가진 지금. 남은 건 거친
세상에서 받은 상처뿐입니다. 바람에 서걱대는 마른 수수깡의 감성
으로는 첫 문장 단 한 줄의 글도 감당하기가 벅찰 것 같습니다.
마냥 즐겁던 어린 동심의 세상이 그리워집니다. 아련히 떠오르는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꼬마 소녀가 되어 나현재 아저씨에게
윤미래라는 이름으로 더 멋진 위문편지를 쓸 수 있으련만.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가 만발한 꽃동네에서, 금잔디로 주단을 깐
동산에서 노래하던 친구들. 시간 여행자가 되어 타임 슬립을 떠나고
싶다. 흘러간 시공에 흩뿌려진 나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