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35] 가정의 달
어머니는/ 연속극을 보다가도 울고/ 뉴스를 듣다가도 울고...
가끔 말 안 듣고/ 속을 태우는/ 형과 나 때문에 울고...자주 술
마시고/ 큰소리치는/ 아버지 때문에 울고...어머니는/ 어머니 때문에
울지 않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웁니다. -서정홍의 詩 ‘어머니’ 중
어떻게 조석은 잘 끓여먹느냐며 시골에서 어머니가 마흔에 결혼한 딸의
집을 찾으셨습니다. 암 치료를 끝낸 지 1년도 안 된 어머니는 보름간
머물면서 구석구석 쳐박아둔 일거리를 꺼내 말끔하게 정리하셨습니다.
애들 키우면 다 그렇다며 면박도 주지 않으시고.
오늘은 이불 홑청을 시치며 주섬주섬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머니는 큰
병을 앓고 난 후로 부쩍 외할머니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널 보면 젊을
때 날 보는 것 같다. 어미는 일더미에 파묻혀 쉴 틈이 없는데 하나뿐인
딸년은 천방지축 싸돌아만 다니니. 어쩜 그리 철딱서니가 없었을꼬.”
외할머니는 18세에 혼인하여 두세 살 터울의 6남매를 낳고 기르느라,
해가 지고 철가는 줄 모르며 사셨지요.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 갈아 두부 쓰고 매주 띄워 장 담그고, 배추 200포기를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말리느라 등 펼 날이 없으셨어요.
동지섣달 긴긴 밤에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 베틀 위에 걸어놓고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무명 한 필을 말기까지 가난한 살림살이에 치어서
삭이는 한숨과 눈물이 오죽했을까. 잠시 쉬었던 어머니가 말을 이어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고 졸린 눈 껌뻑이며 한 뜸 두 뜸 꿰매다가
매정한 바늘 끝에 손톱 밑이 찔려 붉은 피가 몽글 솟을 때 “딸년은
그게 재밌다고 깔깔 웃었단다.” 엄마의 자탄이 이어집니다.
토끼 여우같던 자식들, 돌볼 틈도 없이 스스로 자라서 저마다 짝지어
살림 나 떠나니 떠들썩하던 집안은 절간이 되고 늙은 비둘기 한 쌍처럼
남으신 부모님···.
외할머니 얘기를 전하던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 집니다.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새 칠순이 지나 팔순을 바라보는 우리 엄마.
침침한 눈과 여기저기 쑤시는 삭신과 앉고 설 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딸네 집만 오면 기운이 어디서 나는지 뭉근하게 앉아 있질 못합니다.
그 좋던 인물 아깝다고 늙어가는 큰오빠를 연민하고, 나이 들수록
더 까다로워 지는 아버지를 타박하다가도, 나 떠나면 누가 저 영감
성미를 맞출거나 걱정부터 압섭니다. 하루라도 내가 더 살아야 한다며
생명 줄을 다잡는 엄마입니다.
이 지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존재는 사람뿐입니다. 눈물보가 크거나 박한
사람이 있을 뿐. 나이 들면 마음도 여려져 남의 아픔이나 슬픔까지
그냥 못 넘기고 눈시울을 붉힙니다.
소설가 박범신이 히말라야에서 짐을 지고 가는 노새를 보다가 울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도 평생 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된 삶을 사시다
저 세상으로 간 어머니가 생각났겠죠. 그 얘길 듣던 박완서 선생이 “바로
저게 토종이다!”라고 했다는 노새와 어머니.
우리가 짓는 눈물은 슬프고 괴로워서만이 아닙니다. 순결한 영혼을
지닌 사람임을 확인하는 증표입니다. 낙타도 눈물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눈물은 사람에게 내린 신의 은총입니다. 그마저 없다면 한
많은 세상살이를 어이 달랬을꼬. 말은 할머니를 향하지만 실은 엄마의
시름입니다.
비록 짧은 보름간의 시간이었지만 함께 해준 엄마의 시간은 당신의
딸에게 준 선물과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딸은 비로소 눈물이
사랑이 되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일 다시 해가 뜨려면 타는 노을이 있어야 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려면 오늘 내가 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 또 올지
모르겠다.” 굽은 등을 하고 딸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사이 엄마
앞으로 고속버스가 들어왔습니다.
순간 엄마가 언제 저렇게 늙으셨지? 딸의 가슴으로 물결이 파동칩니다.
엄마를 태운 고속버스가 핸들을 꺾어 나갈 때 뜨거운 것이 넘어옵니다.
비로소 깨치는 것. 할머니가 흘리신 눈물을 엄마가 흘리고, 그 눈물을
지금 딸이 흘리고 있다는 것. 아, 나는 분명한 엄마 딸이구나.
그것이 슬프기도 하고 영롱하기도 합니다. 눈물 한 방울의 사랑이,
눈물 한 방울의 전율이, 유한한 인생의 아련함까지. 눈물은 지상의 언어
중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힘이 있다는 걸 딸이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