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37]
시간이면 다 같은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만 가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더군요. 잠시 머물다
가는 계절처럼, 훅 불며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치는 시간만이 아니라,
깊이로 흐르는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들이 장례를 마치고 미뤄둔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면서 떠올립니다.
깔끔한 성품 탓에 신변 정리도 빨랐던 분이라 정리라고 할 것도 없지만
작은 소품 하나에도 생전의 체취가 밴 것들이어서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몇 시간을 생각에 잠겨 어머니의 시간을 돌아보던 아들이 장롱 서랍
깊숙이에서 지갑 하나를 꺼내 듭니다. 특별한 날에 어머니 손에 들렸던
지갑. 아버지가 소싯적 서울 출장길에 선물로 사 오신 그 지갑이었죠.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제자였던 어머니와 결혼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사범대학을 나와 첫 부임한 학교 제자였어요. 열 살이란 나이
차 때문에 처가의 반대가 심했고 결혼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가 어른들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이, 워낙 사는 모습이 아름답고 신통했으니까요. 시기한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때, 폐병을 앓아온 아버지가
훌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서른일곱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기고···. 그 시절엔 폐병이 흔한
병이면서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발단은 신검에서 나온 이상 소견이었죠.
그로부터 아버지는 열 달 간 공무원 휴양소에서 요양을 하셨고, 다행히
결과가 좋아 이듬해 복직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복직 1년도 채 안 되어 재발이 되었죠. 그 후 1년 뒤 아버지는
진액을 다 쏟은 어머니의 곡진한 간호를 물리시고 이 세상에서의 수명을
끝내셨습니다.
언제부턴가 아들은 자식 하나 바라보며 수절하는 어머니께 죄송했습니다.
어머니 앞길에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 저변에는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의 제자였던 남자분이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 여자를 스승에게 빼앗긴 불운한 남자는 결혼 1년 만에 아내를
잃고 오랫동안 혼자서 사셨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쩌면 그분에겐
기회일 수도 있었겠지요.
외가 어른들은 은근히 부추기는 모습이었고, 할아버지도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며느리를 가로막을 생각은 않으셨지요.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아버지 3년상이 끝나길 기다렸었나 봅니다.
그럼에도 결정적 순간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보고, 연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모든 걸 접고 미뤄왔던 이민을 택했지요. 비로소 어머니의
인생 길이 정리된 셈입니다.
아들 손에 들린 어머니의 유품 지갑. 40년 비원이 담긴 듯한 지갑을
아들은 선뜩 열지 못합니다. 그러다 똑딱! 소리가 침묵을 깨며 지갑이
속살을 드러냈지요. 거기에는 40년 된 두 장의 편지가 단정하게 접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휴양소 생활을 하실 때, 면회를 왔던 어머니를 버스에
태워 보내며 준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편지를 읽고 휴양소로 보낸 답신이었습니다.
종이 한 장에 쓰인 아버지의 편지엔 자작시 한 편이 실려 있었어요.
‘꽃은 왜 향기를 내나.’ 열세 줄짜리 시와 주석은 구절마다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끓는 정분을 꽃가루처럼 뿌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보낸 답장에는 시간의 비밀이 숨어 있었죠. “휴양소 오솔길을
손잡고 걸었던 그 한나절, 제 몸에 흘러들었던 당신의 사랑을 일평생
간직하고 살 거예요···” 두 분이 주고받은 글을 읽고 또 읽습니다.
어느새 아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집니다. 아들은 그제야 어렴풋이
잡히는 게 있었지요. 그날, 아버지와 함께 한 그 한나절과 아버지 사후
40년이 어머니에겐 어떤 시간이었다는 것을.
40년이 사람들에게 평면으로 흐른 시간이었다면, 어머니의 40년은
깊이로 흐른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은 시각으로 흐르는 절대적인 시간도
있지만 깊이로 흐르는 상대적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손잡고 걸은 하루는 깊이로 찾아온 시간입니다.
그 카이로스의 시간이 40년 크로노스 시간을 견디게 해 주었습니다.
깊이로 흐르면서 두께를 만든 사랑이었지요.
어머니의 삶을 지탱시켜준 사랑의 힘, 시공을 넘는 깊이와 두께를 만든
두 분의 사랑에, 삶에, 아들 가슴은 먹먹함 뿐입니다. 두 분 사진 앞에
머리를 숙이는 아들··· “저희도 그렇게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