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과 틈 사이의 온기

이관순의 손편지[258]

by 이관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緣)이라는 것이 파고듭니다. 한 공간에 같이

살면서 때로는 악연, 필연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살아가지요. 이 모두

인연이라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지난봄 40년 넘게 우주를 항해하던 보이저 1호가 자구의 자화상을

셀카로 찍어 보낸 사진을 보았습니다. 지구에서 59억 km 떨어진 곳.

태양계 끝을 향하던 우주선이 렌즈를 돌려 찍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태양계 끝에서 바라본 지구란 존재는 티끌 한 점. 저곳에

80억 인류가 지지고 볶고 싸우는 소용돌이 속의 그 어떤 흔적도 상상할

수 없는, 부유하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가 흐릿할 뿐입니다.


창백한 푸른 점. 이 순간에도 지구라는 티끌 속 공간에는 연을 찾아

무수한 것들이 지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즈음 월간지 편집장과의

만남에서 확인한 연(緣)도 그중 하나죠.


내가 기고하는 월간지에는 매호 긴급 구조를 요하는 어려운 이웃을

소개하는 ‘여기에’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아픈 사연을 읽은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온정을 보태 사랑의 불씨를 살리는 기획물이죠.


대화 중에 지난 호 편집장이 취재해 쓴 주인공에 대한 후일담으로

일곱 살 딸을 키우는 미혼모 이야기를 들었자요. 매호 지면을 원하는

사람이 백 명도 넘지만 그중 한 분을 정하는 일도 연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응하는 그녀 표정이 반기는 것만도 아닌 것이,

질문에나 답하는 웅크린 모습만 보였으니까요. 임신 사실을 안 남자가

떠나고 처녀가 아이를 낳아 미혼모로 전락한 건 한 순간입니다.


‘미혼모’라는 낯선 호칭에 아파하면서도 엄마이길 포기하지 않은 여자.

업고 걸리며 8년째 일터를 전전했답니다. 그렇게 억척스레 모은 천만

원을 교회 장로라 소개한 복덕방 사장을 믿고 집을 계약했다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엔 코로나 사태가 가냘픈 모녀의 삶을 덮쳤습니다. 4천 원을 내면

두 모녀에게 잠자리를 제공했던 찜질방이 폐쇄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갈 곳을 잃은 모녀의 사연이 결국 인터뷰까지 연결된 셈이죠.


교회 권사님인 편집장이 취재를 마치고도 발길을 돌리지 못합니다.

“아이랑 어디 갈 데가 있나요?” “···.” 등을 돌리던 권사님이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요? 나 혼자예요.”


생판 모르는 모녀를 어쩌자고 집에 들이자는 생각을 한 걸까.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얽혀 있는지 모르는데 덥석 말부터 앞세우면,

이 무서운 세상에 말입니다.


그런데 주춤한 것은 애 엄마였어요. 뜸을 들이더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왔는데, 가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권사님은 딴 계획이 있나 보다, 더 묻지 않았답니다.


며칠 후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가도 되겠냐고. 네, 오세요. 다시 연이 되어

모녀가 마석의 권사님 댁에 입주했습니다. 동네에서 물으면 이모라 하고

아이에겐 이모할머니라 부르게 했지요.


혼자이던 집이 갑자기 세 식구로 불었습니다. 애엄마는 며칠 뒤 일도

나갔습니다. 가내공업이 많은 곳이라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요.

애를 맡기고 나간다는 게 꿈같다며 처음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일곱 살 아이가 밥을 안 먹는 거 있죠. 거기엔 딱한 사연이

있었어요. 아이 데리고 일하러 다니기 바쁘다 보니,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요. 발육이 부진한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감싸주는 권사님 덕에 모녀의 얼굴이 펴지고 고단했던 삶이

안정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생겼어요. 덜컥 아이 취학

통지서가 날아든 겁니다. 주소지 탓에 멀리 떨어진 초등학교로.


허약한 아이가 버스를 타고 다니지 못하면 이사를 가야 할 형편입니다.

마음이 바빠진 건 되레 권사님이었어요. 불쌍한 두 모녀를 예전 생활로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죠.


복덕방과 맘 카페를 뒤지고 모녀가 갈만한 거처 찾기에 골돌 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고, 수고 끝에 좋은 정보를 찾았어요.

큰길 건너 새 아파트 단지에 작은 평수의 집이 나온 거였어요.

천만 원만 있으면 계약을 할 수 있는 집입니다.


모녀를 데리고 찾은 집은 한눈에 봐도 신혼집입니다. 가구 가전제품

일체가 새 것이었죠. 친정 엄마란 분이 집까지 사줬는데 이혼했다며

살림 장만 비용의 반만 쳐주면 계약하겠다는 겁니다.


조건은 딱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우리 집

하면 좋겠다고 들떠서 이방 저 방으로 뛰어다닙니다. 말이 없던 아이가

얼마나 좋으면 저리 흥분할까. 처음 아이의 달뜬 모습을 보았습니다.


권사님이 주인에게 모녀의 딱한 사정을 얘기했어요. 그러자 나도

권사라며 대하는 태도가 살가워졌습니다. 그리고 양보까지 해줍니다.

“좋은 일 하시는데 300만 원만 받을 게요.”


이렇게 해서 더 좋을 수 없는 최상의 여건이 만들어지자 3일 여유를

달라 당부하고 세 사람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로부터 고민이 시작

되었죠. 3일 동안 1300만 원을 어떻게 만드나···.


기댈 곳은 잡지에 들어오는 독자 후원금인데 모녀 사연을 읽고 들어온

후원금이 800만 원. 그래도 오백이 부족합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애엄마가 봉투를 내밀었어요. 비상금이라며.


봉투에 260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생기가 돌던 그날 저녁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몇 번 큰돈을 기부해 주신 분인데 주식으로 돈이 좀

생겼다며 상의 차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형편 알고 전화하신 것 같아요. 그러잖아도 어디에 천사가 계신가 찾는

중인데.” 필요한 돈이 아귀를 딱 맞추는 순간이었죠. 기적은 이렇게도

이뤄집니다. 후원한 분들의 간절한 기도가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계약과 함께 건설회사의 승계절차를 마무리하고 이를 담보로 1억 원을

융자를 받기까지 단 하루에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여기엔 신용을 잃지

않은 애엄마의 성실한 삶이 숨어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꿈에도 그리지 못한 내 집을 얻고, 아이는 단지 내 학교에

입학을 하고, 게다가 이모할머니까지 든든한 우군이 생겼으니, 엄마는

아이 걱정 없이 일을 나갈 수 있게 됐답니다.


그녀의 봉급이 190만 원. 은행 월납입 32만 원과 관리비를 내고도

모녀가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지옥 열차에서 천국 열차로

갈아 탄 모녀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다시 티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의 지구를 봅니다. 저 속에서 아등바등

사는 인간 군상들 모습이 덧없기 그지없다가도, 저 미세한 틈 사이로

이는 따스한 연을 떠올리면 숙연해지고 삶이 경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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