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고요 수목원의 봄

이관순의 손편지[219]

by 이관순

봄이 동사 ‘보다’에서 나왔다고 해요. 어원의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우리가 맞은 봄과 딱 떨어집니다. 사계절 중에서 봄만큼 떨림과 깊이를

지닌 것이 없습니다. 생명의 경이를 말하고 있으니까요.


‘아침고요 수목원’에서 봄을 보았습니다. 봄은 노란색을 앞세워 옵니다.

겨울이 미처 다 가기도 전 2월 말이면 노르스름한 풍년화가 피고, 3월

산기슭엔 노란 복수초가 핍니다. 언뜻 민들레와 닮았지요.


생강나무에도 동글동글한 노란 꽃이 피어납니다. 산수유는 생강나무보다

일주일쯤 늦는다고 해요. 노란 물결이 지나가면 복숭아, 살구, 진달래 등

분홍빛 꽃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5월쯤 흰 꽃들이 피기 시작합니다.


25년 전, 아침고요 수목원이 개장할 때, ‘깊은 산속에 비밀의 정원’이

생겼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개장 첫날에

700여 명이 길도 어둑한 이 산속으로 몰려왔다고 합니다.


내가 찾았을 때는 그동안 연 8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돼 있었지요.

사설 수목원으로서는 입장객 수가 가장 많고, 해외로도 소문이 났습니다.

4500여 종의 꽃과 나무들로 차 있었는데 10년 만에 다시 가보니 그

규모가 엄청 커져 국내외 내방객만 연 100만을 넘습니다.


봄날 나무에 물이 오른다는 말처럼 신비감을 주는 표현이 있을까?


뿌리에서 끌어올린 수액이 몸통을 타고 올라 퍼지며 메마른 가지를 살리는

일이 놀랍습니다. 추운 겨울에 수액이 흐르면 몸체가 얼므로, 멈추었다가

때를 맞추어 활동을 시작하는 나무들의 피 돌이가 경이롭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꽃나무의 개화를 보는 것도 신묘한 일이죠. 따뜻한

봄날에 핀 꽃들은, 사실 전 해부터 이미 준비된 것들입니다. 작년 가을에

꽃눈을 만들어 저장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낙엽이 가지에 잎 눈을 남기고 진다는 것은 경건한 일입니다. 새 생명을

잉태시키고 간다는 것이 그래요. 봄날에 꽃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이치가

이러할 진데, 마른 가지에 달려 삭풍 한설에 씨눈을 지키는 일 또한

얼마나 숭고한가요?


대학에서 정년 퇴임한 한상경 교수(원예학)가 필생의 사업으로 전 재산을

쏟아부어 만든 것이 아침고요 수목원입니다. 처음엔 대기업을 설득해 볼

생각도 했지만, 꿈이 퇴색될까 봐 자신의 힘만으로 진액을 쏟아 10만 평

규모의 수목원을 탄생시켰습니다.


‘수목원 4계’는 살아있는 철학 선생입니다. 식물의 생존 모습들이 그래요.

울창한 숲에서 나무의 아래 가지는 세월이 지나면 죽게 마련입니다.

나무는 늘 해를 향해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큰 나무 곁에서는 어린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요.

키를 키우는 나무를 보면서 느낍니다. ‘나무가 태양을 향하고 있는 동안

그 아래로 그늘이 생긴다’는 것을.

인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에 ‘그늘’을 만들 수 있겠구나.

일심으로 욕망을 좇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겠구나.


어느 가을, 상수리나무에서 도토리가 툭 떨어지는 걸 보고 불쑥 ‘왜

열매는 둥글까?’ 생각했는데, 한 교수가 일러줬습니다. 본체에서 가급적

멀리 굴러가기 위함이란 것을.


고목 곁에는 그늘이 져 생육조건이 나쁘다는 걸 도토리가 어찌

알았을까?


수목원에는 늙은 고목도 있고 새로 자라는 나무와 꽃도 있습니다. 그래도

눈길이 가는 건 오랜 세월을 품은 나무입니다. 고목의 굽은 몸통과

가지엔 지난겨울 쏟아진 폭설과 거센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휘어졌을지언정 중심을 잃지 않고 하늘을 보면서 끝까지 오르려는

나무의 고단함도 보이지만 그것이 아름답기도 합니다.


이 풍진 세월 속을 주어진 삶을 지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사람. 길이 끊긴 곳에서 땀 흘려 새 길을 내는 사람들 모습이 이 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납니다.


언젠가 그의 글을 읽었습니다. “숲에서는 해마다 삶과 죽음의 주기를 보게

된다. 요즘 같은 봄에는 신생의 기운을 느끼지만, 가을 단풍이 마지막을

불태우고 나면 어느 날 찬 서리가 내린다. 인생이 그런 것 아닌가.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끝이 있다.”


자연은 이래서 고맙고 감사해요. 하루를 별생각 없이 살아도 툭 떨어진

솔방울 하나, 들꽃 한 송이가 문득 잊었던 자신을 돌아보게 하니까요.

아침고요 수목원은 지금 화창한 봄 교실로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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