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의 꿈

이관순의 손편지[215]

by 이관순

2021. 03. 11 (목)



멸치가 고등어에게 묻습니다. “고등어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반짝반짝

등에서 윤이 나고,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니?” 그러자 고등어가 “비결은

딱하나! 무조건 잘 먹는 거야.”


고등어와 멸치가 나오는 신문광고를 보고 피식 웃던 여자가 돌연 울음을

삼킵니다. 마흔 살 젊음이 할 말을 멸치가 대신하니 설움에 울컥한

것입니다. 내 일상이 비교적 잘 흘러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덜컥 암

환자가 된 뒤 생겨난 감정 변화입니다.


일생을 싱글로 살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요가도 하고 피트니스도

빼먹지 않고 다녔어요. 노후를 생각해 꼼꼼히 내일을 준비했고,

규모 있는 지출로 꼬박꼬박 적금도 부었습니다.


요즘 그 답지 않게 매우 불성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증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짜 놓은 스케줄에 맞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싫고 겁이 나서.


스스로 ‘운명’이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후로 좀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 다 잊고 오늘 하루가 전부인양 하루살이처럼 살아요.

더 이상 연명 따윈 빌지 않을 테니 잠자는 동안 고통 없이 떠났으면,

기도할 뿐입니다.


먹을 만할 때 잘 먹어두려고 맛집 검색하고 찾아다니는데 시간을 씁니다.

절약하자고 먹고 싶은 것 미뤄둔 게 많고, 직장 다닐 때는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대며 깐깐하게 사람들과 어울렸거든요. 병이 들고는 먹지 못했던

것들 일부러 찾아다닙니다.


식당 갈 때는 옷을 가급적 우아하게 차려입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를

불러내요. 오늘은 엄마와 별 넷짜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는데 뜨건

눈물이 목을 넘어갔습니다.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 한참을 멍하게 앉았어요.


“미루고 참다가 내 짧은 인생 다 써버렸네.” 참 멍청하게 살았다는 회한이

고개를 쳐듭니다. 세계 명소를 찾아 여행이나 실컷 다닐 걸. “야,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맛집 화장실에서 하니?” 자신에게 모질게 쏘아붙입니다.


통증도 쉴 때가 있어요. 그 틈을 이용해 요즘엔 죽음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요. 그러다보면 예전에 생각이 없었던 것들을 살피게 됩니다.

관심조차 없던 일들이 지금은 맨 앞 순위에 나와 있어요.


숨이 멎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것들이 궁금해집니다. 암세포가 야금야금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얼른 예전에 재미있던 일을 떠올려요.


오늘은 사두고 묵혀놓은 ‘꾸뻬 씨의 행복여행’이란 책을 폈습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였죠. 정신과 의사가 가장 많다는 프랑스 파리 중심가에 있는

그의 진료실은 늘 환자로 넘쳐났습니다.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틈에서 의사인 자신

마저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죠.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합니다. 그러면서 체득한 행복의 조건을 정리했습니다.


그중 눈길을 잡은 것은 중국 노승에게서 터득한 행복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 이란 것. 알고도

선택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을 목표로 삼고도 이 순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해 눈을 뜨면 보이는 게 행복인데. 새롭게

눈 뜬 행복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우리가 초승달, 반달, 보름달로 부르는 저 달은 한 번도 이지러진 적이

없잖아? 매일이 둥근달인데 왜 정월 대보름만 기다려 소원을 빌었을까.

늘 밝고 둥글게 살 수 있었는데 왜 행복을 착각하며 살았을까?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병이 든 후 실감합니다. 평범하게

여겼던 순간이 얼마나 값진 건지, 소소한 성취를 이뤄가는 보통사람의

삶이 얼마나 축복인지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아침에 읽은 '연금술'이라는 시 구절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 꽃을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해요/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거예요'


지금 마음에는 고통만이 담겼어도 시인처럼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자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머리로는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삶의

연금술사가 되기란 얼마나 힘든지. 그래도 마음을 다잡습니다.


주어진 오늘,

더 이상 오늘이란 일상을 기죽이지 말자.

지금이 축복임을 안 이상,

울지 말자!

눈물이 나도 소리는 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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