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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 있어야 찾아오는 것들

이관순의 손편지[297]

by 이관순

인간관계가 중하다는 건 다 아는 일이다. 일평생 영향을 주고받는 것 중 이만한 것이 없으니까. 가진 것이 넉넉하고 기품 있게 사는 것 같아도 인간관계가 편하지 않으면 실상은 허상이다. 사람이 온유하지 않고, 겸손을 모르면 자신을 잘 모른다. 성품이 모난 사람은 외롭고 불행한 삶을 자초하게 된다. 늙어 모든 게 떠난 병상에 누워서야 세한(歲寒)에 떠는 자신과 만난다.

부부간, 형제간, 남녀 간, 친구와 이웃사이 등 모든 사람 관계를 아름답고 풍부하게 하고, 마음 편하게 활기차게 만들어 사는 법은 하나뿐이다. 내 그릇을 다 채우려 들지 않는 것이다. 80%만 채우고 20%는 비워두는 삶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이 말로는 쉬운 것 같아도 실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도록 도를 닦고 수양을 한 사람도 한순간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욕망이란 본능이다.

서점가의 모든 인생 수험서, 처세론, 철학 서적들이 아무리 외쳐대도 견물생심이라, 욕심 앞에 장사가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내 그릇의 일부를 비우는 일이다. 만수위가 된 댐은 위험하고, 물이 가득 찬 제방은 터지기 쉽다. 음식물로 위를 가득 채우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하면서, 정작 마음엔 별별 오만 잡다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집니다. 차면 기우는 달 같이 차면 넘치는 것이 자연계의 순리이다. 보름달은 차는 순간부터 기울기를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도 비울 줄 아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삶을 풍성하게 이끄는 고상 함이며 삶의 지혜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늘도 안 들어갈 만큼 속이 꽉 찬 사람,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면, 대부분 겉모습과 달리 이기적이고 자기애와 주장이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유불리를 냉철하게 따지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응징하고, 자기를 높여주는 말을 은근히 즐긴다.


세상을 잘 사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좀 모자란 듯한 사람이 정이 많고,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좀 허술해 보이는 사람이 나의 고난에 아파하는 이웃이고 친구가 된다.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하인 게라심 같은 사람이다. 주인이 보기에 그는 어리숙했고 우직하기만 했지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주인이 병들고 병상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위를 맴돈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갔다. 필요에 의해 연결될 사람들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내 곁에 누군가 남아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가 괴로운 건 용변을 볼 때마다 남의 도움을 받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만난 사람은 친구가 고통받을 때 나타난다. 임종을 앞둔

이 견디기 힘든 일을 도와준 건 하인 게라심이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내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대해 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임을 알게 되었다. 끝까지 자기 곁을 지키는 최후의 1인이 된 사람이 게리 심임을 깨달았다. 주인이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우린 언젠가 다 죽잖아요. 형편이 같은 사람인데 주인님을 위해 이 정도 수고 좀 못하겠어요. 이를 어찌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마음이 강퍅했던 이반 일리치는 그런 게라심이 내 곁에 있다는 데 큰 위안을 받고 눈물을 삼켰다.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어질어지는 게 인간이다. 게라심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화려한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귀하고

조금 부족한 듯 살아야 인생이 깊어지고

조금 모자란 듯 살아야 삶이 활기찹니다.

조금 손해 본 듯 살아야 관계가 좋아지고

조금 지는 듯 살아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화려한 삶을 연모하지 말아야겠다. 좀 부족하고 모자라야 바람이 드나들 틈이 생기고 햇빛이 스며들 틈이 보인다. 대리석이 차가운 것은 겉은 매끄럽고 화려해도 틈이 없으니 냉한 자기 체온뿐이다. 다른 사람이 들어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겠다. 바람이 들고 빛이 찾아와 섞여야 생명이 자라고 풍성해진다. 그 틈으로 새가 찾아와 집을 짓고 노래를 들려준다.

틈이 없는 사람은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만 강한 사람이다. ‘어우렁 더우렁 살자’라는 사람은 틈이 그리운 사람들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란 사람은 틈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서로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살려 줄 때 지금 사는 세상이 보다 살만 해지지 않을까? 현실에 자족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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