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관순의 손편지
설을 앞두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 고향에 갔습니다. 고향에는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시장 중앙에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목욕탕이 있습니다. 예전엔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띤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낡고 옹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나는 목욕탕 건너편의 음식점 창가에 앉아 한동안 스치는 상념에 잠겼습니다.
슬프게도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외아들인 나를 데리고 저 목욕탕에 가지 않으셨지요. 단 한 번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일곱 살이 넘도록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미리 알려준 대로 누가 물으면 손을 활짝 펴보며 다섯 살이라고 말했지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눙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욕탕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 앞에서 그만 말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쩌믄 애가 이리 크노, 니 몇 쌀? 여덜?"
내 눈을 빤히 보며 묻는 할머니에게 당황한 나머지 입속에 준비된 다섯 살을 깜빡하고 일곱 살이란 말을 툭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차,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 바람에 여기 저기 쭈그려 몸을 닦던 할머니들과 아줌마들로부터 공격을 당한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서둘러 탕을 나왔습니다. 간이 콩만 해져 슬금슬금 어머니 눈치만 보는데 어머니는 내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번에도 짓궂은 할머니 한 분이 서 있는 내 앞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습니다. "어디 좀 보자 요놈 고추보레 실하게도 여물었네. 아이고 야."
하곤 내 고추를 툭 건드릴 때는 가뜩이나 후끈한 목욕탕 열기까지 얼굴에 쏟아져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골이 잔뜩 난 얼굴로 식식대던 내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탕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물속에다 얼굴을 감추는 일이었습니다. 그 목욕탕.....
나이가 더 들자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는 처음 나를 혼자 남탕에 들여보내며 말했습니다. 딴전부리지 말고 구석구석 때 잘 밀고 오라고. 그때 나는 남자가 되었다는 기분에 우쭐 했습니다. 비로소 내 자리를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날아갈 듯 몸이 가뿐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혼자 손을 뒤로 비틀어 낑낑대며 등을 밀어야했습니다. 등을 밀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명절을 앞둔 목욕탕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중에 부자가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러운 눈으로 힐끔 쳐다보았습니다. 이렇게 명절이 가까워지면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띠었지요. 때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좀 더 들어서는 목욕비를 아끼려고 아버지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내 멋대로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등짝에 살이 숯덩이처럼 검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것은 아버지가 공사현장에서 쓰러져 도립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 후의 일입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해의 일이었지요.
아들이 밀어드리고 싶었던 아버지의 등. 들어내기 싫어서,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당신의 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해가 지면 달을 지고 걸으셨을 길, 달이 지면 해를 등에 지고, 한없이 걸어갔을 그길.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그리도 구성지게 부르신 걸까. 그 길의 끄트머리는 적막강산 같은 등짝에 화인처럼 찍혀 있는 지게에 눌린 두 줄의 검은 자국.... 그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입원실 욕탕에서 내가 아버지의 몸을 욕수에 누일 때까지도.
내가 몸을 씻겨드릴 때, 아버지는 모든 것을 체념하신 듯 눈을 감고 계셨지요. 어쩌면, 이제는 다 컸으니 흉이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더 이상 감출 힘이 없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이제야 아들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는구나. 나를 불효자로 만들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생각하며 뜨겁게 눈시울을 적셨었지요.
호랑이의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은 아버지의 고단한 삶의 흔적.... 눈발도 흩날리지 않았던 밤입니다. 윙윙대는 바람소리만 길에 가득 차오르던 밤, 섣달그믐 날의 밤의 일이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저벅저벅 눈길을 밟고 오는 발자국소리를 기다립니다. 올해도 창가에 귀를 대며 읊조립니다. 오소서 아버지...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