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빨래터

이관순의손편지[33]

by 이관순

어머니의 빨래터

요즘 자연의 부름은 빛깔들입니다. 붉은 봄꽃이 이울면서 먼저 불려왔던 연두빛 뒤로 초록빛 무리가 벌써부터 거드름을 부립니다. 때마침 몽골의 친구가 보내온 사진 속에도 5월의 신록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어머니는 미뤄둔 겨울빨래를 하려고 개울에 나갑니다. 그 뒤를 빨래짐을 진 아들이 따라서지요. 어머니는 집에가 쉬라지만, 빨래가 끝나도록 어머니 곁에 앉아 말동무가 됩니다. 지루하지 않게 이런저런 말보를 풀다보면 어머니도 좀처럼 않던 심중의 얘기를 꺼내시지요. 우리 모자는 많은 얘기를 빨래터에서 나눴습니다.


딸 없이 아들만 셋 둔 어머니가 안쓰러워 주말이나 방학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지냈습니다. 게다가 어머닌 우리 형제의 어머니만도 아닌 것이 당신이 개척한 교회의 교인들까지 돌봐야 했으니까요. 아들 셋 공부시키고 교회를 건사하느라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지만, 어머니는 늘 밝은 표정으로 찬송을 불렀지요.


어머니의 한숨을 받아준 빨래터. 아들과 빨래터에서 얘기하길 좋아한 어머니. 이불 같은 큰 빨래는 아들이 비누칠하고 치대고 헹구어 짜고 널고... 때로는 풀 먹인 이불호청을 맞잡아 당기고 다듬질해 마지막 씻는 일까지 함께 했습니다. 내 교복은 물론 출장 때 입으실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바지 다림질은 내가 맡아 했지요.


종교가 없던 어머니는 30대 한창 때에 중병에 걸려 대구 동산병원에 몇 달을 입원했으나 ‘이젠 더 해드릴 게 없다’는 일종의 선고를 듣고 영동 심천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한국전력(현)의 지방사업소 책임자이셨을 때였죠. 올망졸망 어린 삼형제가 눈에 밟혀 어이 갈까. 그때 어머니가 마지막 혼신을 다해 붙잡은 곳이 교회였습니다.


가누기도 힘든 몸을 지게에 이불을 얹고 앉아 교회에 나갈 만큼 신앙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고, 방안 가득 울음이 차오를 때, 아버지는 한 쪽에서 부음 전보를 준비하셨지요. 그러길 1시간여. 이모가 놀란 소리로 형님을 불렀고, 검은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꼬대처럼 ‘하나님이 30년간 쓰신다’고 했다는데 가족들은 깨난 어머니에 정신이 팔렸었지요.


그렇게 회생한 어머니는 신기할 만큼 빠른 회복을 보이셨습니다. 미음, 죽, 밥, 보양식을 주단위로 바꾸더니, 달포 만에 교회에 나갈 정도가 되셨지요. 신심으로 뜨거워진 어머니는 완전 새사람이 되었고, 그즈음 아버지가 새 임지로 발령을 받아 우리 가족은 충남 금산으로 이사를 갑니다.


문제는 그곳에 교회가 없었어요. 주일은 다가오는데 교회는 없고, 고심 끝에 어머니가 아들 셋을 앞에 앉히고 예배를 결행하십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배는 하나 둘 사람이 더해지며 안방이 협소해지고, 다시 대청마루에 나가 예배를 드리지만 해를 못 넘기고 비좁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구세군본부에서 24인용 군용텐트를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그 텐트를 동산 밑에 쳐 새 예배처를 만들었지요. 이때도 예배인도는 어머니 몫이었고, 우리 형제는 교회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맡았지요. 교회에 나간 지 1년 남짓한 분이 어떻게 성경말씀을 전했는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교인이 늘자 본부에서 사관(목사)을 파송했습니다. 하지만 그 뒷바라지는 여전히 어머니 몫이었지요. 아버지 봉급으로는 아들들 공부에 올인 해도 벅찬데 교회 살림까지 맡았으니 그 어려움이 오죽했을까. 교회는 다시 천막을 걷고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면 농사일을 마친 교인들이 달빛 아래 흙벽돌을 찍고, 개울에서 자갈과 모래를 퍼날았습니다. 돈이 없는 처녀들은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내놓았어요. 이 사진이 구세군 신문에 소개되고, 이에 감동된 해외교회에서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엔 검은 루핑을 올린 멋진 교회가 이렇게 완공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겐 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세계 구세군의 리더인 만국 대장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개척지로 우리교회를 찾겠다는 통보 때문입니다. 빈궁한 시골에 말로 듣던 코 큰 서양사람, 구세군 대장이 찾아와 하룻밤을 보낸다니 어머니 마음엔 걱정이 태산입니다. 음식, 잠자리, 심지어 화장실까지... 어머니는 주야로 기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방문 한 주를 앞둔 날, 어머니와 빨래터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엄마 괜찮으시겠어요?” 아들이 걱정하자 “걱정마라. 모든 건 하나님이 해주실 게다.” 그때 어머니의 담대한 모습을 보았지요. 어머니는 온 정성으로 손님을 맞았습니다. 그분이 떠나면서 “원더풀, 베리 해피!” 어머니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할 때, 나는 수줍게 웃는 어머니를 천사처럼 바라봤습니다.


올봄, 부모님 산소 가는 길에 그 빨래터를 찾았습니다. 50년이 지난 곳에 흔적이 남을 리 없지만, 마른 건천이 된 빨래터에 한참을 앉아 어머니의 그리움을 더듬었습니다. 어느 해던가 어머니 추도예배에 참석한 이모님이 말씀하셨어요. “어머니가 죽었다 깨나면서 하신 말 기억들 하냐? 따져보니 신기하게도 꼭 30년을 사셨더구나.” (소설가/daumcafe/leeletter)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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