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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May 21. 2023

사랑보다 측은지심

이관순의 손편지[347]  2023.05.22(월)

          

       

  동물의 세계에도 먹이보다 더 집중하는 것이 새끼를 낳아 번식하는 일이다. 하물며 사람은 말해 무엇하리. 인류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생육의 토대는 우선 남녀 사이의 결합에 있다. 그런 둘 사이를 대개 ‘정(情)’이라는 글자로 엮어놓는다. ‘정’이라는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잘 포장해 놓은 단어가 ‘사랑’ 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는 사람을 ‘연인’이나 ‘애인’이란 말로 즐겨 쓰지만, 옛사람들은 정인(情人), 정려(情侶)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우리는 나남 없이 정을 나누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부부가 되고 평생의 반려자로 남는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맹세한 데는 분명 사랑이란 정분이 깔렸을 텐데, 사랑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일까? 이따금 사랑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뜨겁던 부부애가 왜 노인이 되면 시들해지는 걸까. 신혼기의 살뜰한 감정을 끝까지 이어가는 사람을 경험하지 못했다. 딱히 정이 시들해진 것도 아니고 관계의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닌데, 무덤덤해지고 주고받는 말수가 줄어든다. 때로는 말하기조차 귀찮아진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오늘도 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이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통해 동물의 세계를 보았다. 수컷들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하게 전투를 치르고 최후의 승자만이 암컷을 차지한다. 전리품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에 운우지정을 나누고, 그렇게 해서 새끼를 얻는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거기까지이다.      


그러고 나면 뿔뿔이 자기 길을 찾아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붙잡거나 연민도 없이 헤어진다. 애당초 사랑 같은 건 그들 사이에 없었던 것처럼. 있다면 충만한 사명이 있을 뿐이다. 그 사명을 포장한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면 사랑은 스치는 한 줄기 바람이다. 신록의 정기가 온 산을 뒤덮던 날, 학창 시절 서클에서 만난 묵은 친구들과 청계산으로 산행을 갔다. 두 달에 한 번 모이는 산행 모임이다. 함께 한 일곱 친구 중에 셋이 여성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식당에서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흔한 말로 뒤풀이를 했다. 큰일을 했다고 하산주가 돌았다.      

  남자 테이블에서는 저마다 철 지난 월남전의 무용담을 화제로 삼고 여자 테이블에선 철 지난 남자들의 쓸모없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나의 귀가 여자 테이블로 열린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 얘기로 들려서였다.   

 

“서방님은 아직도 집에만 계셔?”

 “어디 가겠어. 처음엔 껌딱지처럼 집에만 있다고 면박도 주고 미워도 했는데. 이젠 측은해. 기가 빠져선지 잔소리도 줄고, 뭔가 돕겠다고 주방에서 어정거리는 것도 측은해 보이더라.”

 “그래도 그 집 어른은 양반이네. 우리 집 박사님은 지금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법이 없어.”

 “아직도?”  

   두 여자가 동시에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너 참 힘들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봉건시대 남자가 지금도 있느냐고 타박하는 눈빛을 찔금 흘렸다. 

 “지금도 밥상 차려줘야 먹고, 과일 깎아 대령해야 들고, 라면 하나도 못 끓여 먹는단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이젠 포기하고 살아.” 

   남편 걱정 때문에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여자다.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다가도 시계를 보다 벌떡 일어나는 여자는 그 친구뿐이었다. 학교 다닐 때, 누구 하면 다들 고개를 흔들 만큼 까다롭고 자아가 강했던 여자가 어찌 저리도 변했을까.     

  “지금도 하루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지어 봉양하니?”

  “어쩌겠니. 그래야 좋아하는 걸. 그것도 돌솥밥. 맛있다고 돌솥밥만 찾으니까.”

  “그러고도 사는 네가 존경스럽다.”

  “불쌍해서 산다. 어떤 땐 얄밉다가도 나 없으면 하루도 못 살 위인이지 생각하면 안 됐어. 다 떠나서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 이젠.”

  그 말을 용케도 들었는지 건너 테이블의 남자 친구가 여자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불쌍한 건 할머니 당신들도 마찬가질세. 어느 날 소파에 기대어 입 딱 벌리고 코를 고는 마누라 모습 보니까 슬프더라. 그래서 내가 지고 산다.”     


  결혼한 지 40년이 다 넘은 친구들이다. 한 친구는 불쌍해서 살고, 또 한 친구는 측은해서 살고…. 그날 일곱 친구 모두는 사랑보다 ‘측은지심’으로 산다는 데 동의했다. 물고기들도 몸에 물이 마르면 서로를 침으로 적셔준단다. 노년의 부부는 서로를 연민하면서 측은히 여기면서 산다. 젊어서 한가닥 안 한 남자 없고, 모두 콧대 높은 여자들이었는데, 세월이 어느새 우리들의 표정까지 이렇게 두리뭉실 무색무취, 무정, 무미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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