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오네
이관순의 손편지[361] 2023. 08. 28(월)
올여름, 낭만은 없었다. 미쳐 돌아가는 염천 아래로 극한 폭염과 극강 호우,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에 급급해야 했던 올여름은 애초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푹푹 찌는 날씨에 세 시간 걸리는 열차에 몸을 실은 건 여수 밤바다는 다르겠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둑한 밤바다를 보며 넘실거리는 파도를 연상시키는 멜로디에, 읊조리듯 속삭이는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상상했다. 이 노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당시 잘 나가던 장범준에게 여수엑스포를 띄워줄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나온 노래다.
그런데 웬걸 수많은 ‘낭만 포차’에선 아이돌 그룹 노래가 고막을 때렸다. 늘 기대는 70~80%에 놓아야 하는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았다. 시어터진 갓김치를 우적우적 씹다가, 밖으로 나와 조명 없는 곳에 걸터앉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밤하늘에 뜬 둥근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좀은 청승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구나. 이제 내가 살았던 세상의 낭만이 기댈 곳은 생각보다 좁다랗 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면서 연 나흘째 동해안을 훑으며 차를 몰고 주유천하 중인 대학 동창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는 지치지 않고 좌충우돌한 그날의 에피소드를 뚝딱뚝딱 만들어 카톡에 올렸다. 내 주변에 몇 안 남은 서정파이자 유일한 낭만가객이다. 댄스면 댄스, 노래면 노래, 운동이면 운동(테니스, 탁구, 수영), 더하여 사람까지 좋아해 새벽부터 밤까지 그가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즐기는 것만 꼽아도 열 손가락은 펴야 한다. 그 나이에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길 줄 알고 사랑하며 힘써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보며 잘 놀고 즐기는 것도 타고난 복이라는 걸 생각한다.
세상에는 ‘기다리는 것’과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다가 스친 것이다. 늘 생각했던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의 입장으로 생각을 비틀어 보았다. 극 중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고도야 말로 오히려 그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초조함보다 불안과 긴장이 더 크지 않았을까? 무대에 오르기 전 막 뒤에서 느끼는 배우들처럼.
분명 고도는 어딘가에 오고 있다. 그 점만은 진실이다. 단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기다려지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고도의 존재는 온전히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남보다 만남 이전의 기다림의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갑자기 ‘고도를 기다리며’를 생각한 것은 순전히 가을 탓이다. 오후 들어 한바탕 소나기가 훑고 지나간 산능선 위로 뭉게구름이 해맑은 하늘에 떠 있고, 그 푸른 하늘 끝에 물린 검단산 자락이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처서(處暑)가 지난 지도 닷새째다. 이제 모기 입은 삐뚤어지고 풀은 더 이상 웃자라지 않는다는 자연의 신호를 사람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감지할 줄 안다.
여전히 한낮 더위는 쨍쨍해도 높이 뜬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가을이 스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서 계절의 박동을 느낀다. 우리가 여름에 지쳤던 강도만큼 기다림을 키워온 가을이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오늘은 안 오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차질 수밖에. 그래서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고 좋은가 보다.
처서가 지나면서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소슬하고 풀벌레 우는 밤이 가깝게 다가온다. 풀잎에 이는 바람의 숨결이 다르고, 꽃잎마다 달린 아침 이슬이 영롱하니 빛난다. 길가에 갓 피어난 코스모스가 생글생글 웃음 지며 하늘하늘 속삭이는 것도 이맘때 풍경이다.
“나 많이 기다렸나 봐? 조금만 기다려. 다 왔어.”
“어서 와. 팔월도 낼모레가 끝이야.”
8월의 밑동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이 한결 밝아진 것 같다. 떠나는 여름에 대한 원성만큼 상대적으로 커진 다가올 가을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는 사이 여름의 잔해부터 거두어 내자. 눅눅한 옷가지는 햇볕에 보송하게 말리고, 장독대는 독마다 뚜껑을 열어놓고, 책들은 거풍 시켜 책갈피로 스민 습기를 날려야겠다.
이제 여름은 가고 가을이 대세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밤공기는 더욱 서늘해질 것이고, 텃밭에 내린 아침이슬이 바짓가랑이를 휘적실 테니까. 계절은 이렇게 쉽게도 가고 오는데, 우리는 또 얼마나 어렵게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할지. 문득 여수 밤바다에서 바라보았던 둥근 달이 떠오른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날 밤 돌산공원에서 두 대교의 불빛이 아련하고 아득해 보인다. 설레는 기다림도, 작별의 아쉬움도, 쓰라린 아픔까지 지나고 나면 모든 게 그리워지는 법이다. 어느새 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보인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