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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Oct 01. 2023

서울이 빛을 잃어버렸다

18-17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만 모르는 게 있단다.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경관이 그중 하나로 꼽았다. 남으로는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 중심에 남산이 우뚝 서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을 겹겹이 두른 서울에 찬사를 보낸다. 광화문 빌딩 숲을 따라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의 백미라고 입을 모았다.  국가 간 경쟁은 궁극적으로 ‘도시 간 경쟁’이다. 도시마다 그들만의 문명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흥망은 사람이 주체지만, 삶을 구현해 주는 것은 도시이니까. 로마, 뉴욕, 파리가 그렇고 우리 서울이 그렇게 발전한 셈이다.     

  침체해 있던 TV 사극이 화려한 부활을 알린 건 1996년 방영된 ‘용의 눈물’로 기억된다. 조선 건국을 위해 한양 천도를 계획할 때, 3인의 실력자가 한양 풍수를 논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서울 운세가 그들 손에 달렸다니, 그래서 역사란 무서운 것이다. 당시 하륜은 주산을 연대 뒤 무악에 두고 그 앞으로 도심을 열어야 한다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북한산과 남산을 좌청용 우백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됐으면 지금쯤 서울은 동대문, 청량리 아니면 신촌으로 번창하지 않았을까?      

  결국 정도전이 서울 역사를 썼다. 왕은 남면을 향해야 하니, 백악을 주산으로 경복궁을 두고 안산을 관악으로, 그 앞에 한강을 둔다는 것으로 대세를 이끌어 관철시켰다. 단 하나 남산이 화기가 너무 강한 데다, 산이 둘러싸여 화재나 변란이 쉽게 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제어하기 위해 궁 곳곳에 도랑을 내고 다리 위에 불 먹는 신 해태를 세웠다. 그만으로 부족해 산에서 나오는 물길을 정비해 지금의 청계천 물길을 만들었다.  청계천의 물줄기는 특유의 특별함이 있다. 백두대간의 지형 특성 탓에 우리나라 강은 동에서 일어나 서로 빠지는 동출서류(東出西流) 형이 주류인 셈인데, 청계천은 반대인 서출동류(西出東流) 형으로 흐르고 있다. 북악· 인왕· 도봉산 등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모여 역(西)으로 흐르는 독특한 형국을 보였다. 예부터 풍수지리에서 중시한 게 역술인지라, 이조 역대 왕들이 청계천 관리에 각별하게 공을 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의 살기에 눌려 모두가 기를 숙인 연말에도 남산 둘레길엔 여전히 사람 소리가 났다. 언제 와도 듣는 살가운 소리들이다. 그 틈으로 외국인들도 어깨를 흔들며 서울 풍류를 즐기고 있다. 마침 남산 서울타워 쉼터에서 경쾌하게 웃는 장년 여성들과 만났다. 

 “자주 오시나 봐요?” 

 “친구들과 매주 한 번 와요. 오늘이 그런 날이에요” 

 “이 친구는 매일 와요. 밥은 안 먹어도 남산은 안 빠져요. 둘째 가기 서러운 남산 마니아래요.”    그러자 지목을 받은 여성이 말했다. 

  “보세요. 사방팔방으로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잖아요. 세계 어느 도시가 이런 데가 있어요? 그   래서 난 이사도 못 가요. 회현동에 50년짼데 아파트가 후져도 그냥 사는 거예요.” 

  그 여성은 서울 사람이 서울을 더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오늘따라 청명한 대기에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 자락이 거울 속처럼 선명하고 멀리 구리, 덕소가 시야에 잡혔다. 그 여성 말대로 명품도시가 따로 없어 보였다.    

  서울은 밤의 도시이다. 낮에 침잠했다가도 해가 지면 빛으로 성장(盛裝)한 빌딩군이 빛의 무도회를 시작하고, 12월에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한 서울이 올해는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청계천에 오색빛까지 사라지면서. 매년 이맘 때면 떠오르는 풍경이 형형색색의 한지 조명으로 물든 청계천 빛 축제가 압권이었다. 2009년 한국 방문의 해에 시작된 뒤 연말이면 서울을 빛으로 장식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빛 축제가 2020년 12월에는 빛을 거두었다. 모처럼 찾은 나의 발길을 무심하게 돌려세웠다.     

   영롱하게 빛났던 빛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제사 사라진 불빛 사연을 들었다. 코로나가 11년 전통의 청계천 빛 축제를 날려버리고, 연말의 보신각 타종까지 멈춰 세웠다는 쓸쓸한 소식을 청계천에 나와서 알게 되었다. 서울의 밤이 시작되자 시끌벅적해야 할 거리마다 인적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불빛과 사람들 소리로 가득해야 할 청계광장, 시청 앞 광장,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까지 황량한 공터로 변해버렸다. 

    밤 9시가 가까워지자 인근 상점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졌다. 불이 꺼진 서울은 음습했다. 공습경보가 내려진 영화 속 유럽 도시들처럼, 악령들이나 배회할 듯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코로나의 공습이 이렇게 도시를 속수무책으로 만들고 잠재워도 항변하지 못했다. 21세기 문명도 기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산타클로스도 보이지 않고 캐럴도 들리지 않는 차가운 크리스마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말 조용한 밤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하기를, 구세군 자선냄비는 더 뜨겁게 끓기를 기원하는, 2020년 12월 20일 밤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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