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나 Nov 03. 2020

만나지 못해도 좋은 인연

대영아! 교사 초년 시절 내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나의 사랑하는 제자. 순하디 순한 네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우리 반은 여학생 35명, 남학생 35명 남녀 합반이었지. 지금 너희들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우리 반에 달리기를 잘하던 범이가 있었지? 중학교 1학년생, 범이가 교내 체육대회에서 달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힘은 아름답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어. 범이는 에너지가 많은 학생이었는데, 그땐 내가 그 나이 또래 남학생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 범이를 좀 더 포용하지 못한 거, 나중에 후회되더라. 미안하고.    


샘도 많고 의지가 강했던 숙형이, 코스모스 같아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던 수정이, 기자가 되고 싶다던 똑똑하고 예쁜 경아, 키가 190cm에 가깝던 승표, 승표가 옆 반 정연이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차여서 울던 것, 기억나니? 그 옆에서 승표를 다독이던 든든한 경섭이.... 거의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 기억 속에는 그때 니들 모습이 생생하다.    


다리가 불편하던 영철이 기억나니? 부모님이 안 계셨어. 소아마비가 아니고, 어려서 엉덩이에 난 종기를 가짜 돌팔이 의사가 잘못 건드려 그렇게 된 거래. 몸 상태도 안 좋아서 수업 중에 자주 기절했었는데.... 영철이 장래 희망은 공무원이었어. 녀석이 똑똑하니까 분명 자기 꿈을 이뤘을 거야.     


대영아!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좀 재미있었잖아. 그치? 그런데 우리 반 어르신, 근엄한 정모는 1학기 동안 진짜 한 번도 안 웃더라. 근데 2학기가 되니까 슬슬 웃기 시작했어. 늘 점잖게 앉아있던 아이가, 웃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굴을 살짝 돌리더니 입을 가리며 웃더라.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어.    


아, 승만이 소식도 궁금해. 승만이의 장래 꿈은 중국집 식당 사장이었어. 각설이 타령을 잘 부르고, 책상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우리 반 말썽꾸러기였는데.... 니들이 졸업한 후에 들은 소식인데, 중국집에서 음식 배달한다고 그러더라. 지금쯤이면 아마 승만이도 자기 꿈을 이뤘을 거야.    


대영이 니가 들고 다니던 가방 기억나니? 70년대 남학생들이 들고 다니던 쑥색 가방. 충청남도에서 유학을 왔던 넌, 형하고 자취를 한다고 그랬어. 아무 부끄러움 없이 형이 들고 다니던 찌그러진 가방을 잘 들고 다니더라. 그 모습이 대견스러웠어. 내가 그때 “우리 반에서 대영이 가방이 제일 멋지다.”라고 말한 거, 사실은 네가 멋지다는 뜻이었어.    


너 중3 때 지각한 거, 기억해? 중3 담임선생님이 나한테 와서 그러시더라. 대영이가 학교에 안 왔다고. 혹시 연탄가스 사고가 났을까 봐 걱정했었어.  네 자취방에 학교 가자고 일찍 찾아갔던 성훈이와 함께 잠들었었다며? 네가 학생회장 하던 성훈이하고 단짝이었지. 성훈이가 라면 7개에 한 밥통이나 되는 밥을 대영이 하고 같이 말아먹었다고 자랑하더라. 그러니 이삼 년 사이에 키가 30cm나 컸지.    


중1 추석이 지나고, 네가 고향집에서 가져온 삶은 밤을 교무실 책상에 두고 갔었는데, 기억나니? 그 작은 토종밤 진짜 맛있더라. 달고 고소한 노란 속살이 꿀맛이었지. 아, 떡도 기억난다. 너희가 졸업한 다음 해, 졸업식에 네가 찾아왔었어. “졸업시켜놓으니 얼굴 한번 안 보여서 서운하셨죠? 선생님이 서운해하실까 봐 왔어요.”라고 말하더라. 따끈한 떡이 식을까 봐 가슴에 품고 왔다고 하면서 풍성한 잠바 안에서 떡 봉지를 꺼내는데, 내 콧등이 시큰했잖아.    


대영아!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젠 소식도 잘 모르고, 만나지 못해도 너희들과의 좋은 인연.... 감사한다. 평생토록 간직할 소중한 기억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작가의 이전글 메멘토모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