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 후
드디어 봄이 오고 산골의 생활은 바빠졌다. 농사 준비와 하루가 다르게 나오는 새싹들을 지켜보며,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야 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었다. 담 밑으로 쑥과 돌나물이 삐죽삐죽 나오기 시작했다. 겨울 찬바람에 샘물을 타고 쫄쫄 내려오던 호스 속의 물들도 따스한 봄볕에 물줄기가 굵어졌다.
싹을 틔워서 비닐하우스의 포트에 심기길 기다리는 고추씨가 아랫목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들로 산으로 나물을 캐러 다니기 시작했다. 겨울의 냉한 기운 속에서도 냉이는 잘 자라고 있었다. 얼굴을 내민 냉이의 목을 잡고 잡아당기다 뒤로 벌러덩 나가 자빠지기도 하며 캔 냉이의 뿌리는 길고 굵고 맛이 달았다.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달래도 캐어 담고, 쑥도 캐어 담으며, 아이와 나는 밭에서 흙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기 일쑤였다. 아이는 밭에 떨어진 대추를 그냥 집어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지나가는 벌레를 잡아 입에 넣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뺏어 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크고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이유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알고 이모들이 서울에서 이유식이 될만한 음식들을 사서 보내 주기도 했다.
그래도 젖이 부족했던 아이는 늘 무언가를 먹으려고 했고, 아이의 먹거리가 적었던 탓에 아이는 체격이 작고 야위어 있었다. 분유통에 그려진 모델 아이처럼 튼실한 체격으로 자라진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비닐하우스에서는 고추가 한참 크고 있고, 밭에서는 로터리를 치고 씨앗 파종을 위해 고랑을 만들었다. 봄볕이 쨍쨍한 날 우리 가족은 모두 산비탈의 밭에서 옥수수를 심었다. 옥수수 씨앗을 한 구멍에 2알을 넣고, 흙으로 구멍을 덮으면 끝나는 단순한 작업인데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하기 싫어졌다. 옥수수를 2천 평이 되는 밭에 파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대충 몸에 묻은 먼지만 털어내고 마루에 앉아 쉬고 있는데, 방에 들어가신 아버님이 티브이를 켜자, 공무원을 올해는 몇 명을 뽑고, 언제 배치하겠다는 시험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공무원은 친정아버지가 적극 추천했던 직업이었다. 졸업을 하면 당연히 시험을 치고 공무원이 되기를 꿈꿨던 내가 하루아침에 남편을 따라 신골로 들어와 버렸으니... 아버지의 상심도 크셨겠구나...라는 생각에 잠겼다.
흙 투성인 헐렁한 바지에, 얼굴은 촌 아낙이 된 내가 갑자기 한심스럽게 느껴지면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들은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겠지... 도대체 내가 왜 산골 구석에서 이러고 있을까?
다음날 아침 밭에 나가는 부모님에게는 천천히 따라 나가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아이와 함께 마루에 앉아 마당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듯한 봄 햇볕은 마루까지 비껴 들어와서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고, 마당에서는 참새들이 먹이를 찾아 열심히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햇볕을 받고 앉아 있노라니, 햇볕은 마루 끝에 앉아서 느끼는 것보다 대도시의 빌딩 숲에서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봄 햇살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점점 마루 안쪽으로 비추면서 어서 바깥으로 나가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밭으로 찾아가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겨 두고,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최대한 좋은 옷으로 잘 갖추어 입고, 산골로 들어올 때 신고 왔던 구두를 찾아 신고, 재를 넘어 군청으로 향했다. 군청 담당자에게 원서를 받아 작성하여 제출하고 접수증을 받아보니 접수번호가 1번이었다. 원서 접수 첫날에 첫 번째로 접수를 한 것이다.
원서를 접수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개 정상에 서서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보고 서있는 내 머리 위로부터 봄 햇볕이 발끝까지 내리쬐는 것이 그대로 어디론가 가라고 하는 듯했다. 집을 나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더라도 아이만큼은 단속을 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걷다 보니 오랜만에 신은 구두는 내 신발이 아닌 듯하여, 이리저리 돌부리에 체이더니, 굽은 떨어져 나갔고, 발목이 시큰거리면서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고개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구두를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구두를 벗에 양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시부모님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도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셨다. 산골의 생활이 오죽 답답했으면, 처음 이곳으로 올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을 신고 외출을 하고 돌아왔을까? 이미 마음을 다 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점점 봄의 햇살은 따뜻해지고 꽃망울이 피기 시작하면서 산골에도 완연한 봄이 되었다. 집 주변으로는 야채를 비롯하여, 토마토, 참외, 수박등 여름 과일들이 싹을 피우기 시작했고 앞산에는 산벗 꽃들이 온통 분홍빛으로 만발해, 봄 햇살로 마음이 들떠 있는 나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나는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좋아했다. 처음 이곳 산골에 올 때도 햇살이 따사로운 봄이었듯이 따사로운 봄 햇살은 언제나 나를 충동질시켰다.
이른 아침부터 밭에서는 비닐하우스에서 크고 있는 고추 모종판을 밭으로 내가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다른 작물들을 심기 위해서는 모종판에서 적당히 자란 고추모를 내일까지 옮겨심기를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고추 3천 포기를 심는 데는 꼬박 삼일이 걸렸다.
봄볓에 아이를 업고, 새참을 준비하여 머리에 이고, 밭으로 가는 것이 유달리 힘이 들었다. 나른하게 비추는 봄볕 탓도 있지만, 이미 봄이 되면서 내 마음은 도시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참을 내려놓고, 부모님께서 다 드시기를 기다렸다가 읍내가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린 후 아이를 업은 채로 읍내로 향했다. 내일이 시험 당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곳을 나가야 만했다.
시험을 보러 간다고 하면 부모님께서는 필시 반대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아이와 함께 나가면 의심받지 않을 거란 생각에 아이를 업고 집을 나왔다. 일단 애를 업고 남편이 있는 양구로 가서 면회신청을 하고, 아이를 맡기고, 나는 시험장이 있는 춘천으로 향한다는 계획은 이미 짜 두었기 때문에, 읍내를 나와 양구행 버스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시골길에 4시간 이상 걸리는 버스 속에서 아이는 배고파서 우는지, 불편해서 우는지 울음을 터트리더니 멈추지를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과 나만의 욕심으로 아이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지는 것이 아닌지, 후회가 들기도 하였다. 버스 안의 어르신들은 어린 새댁이 아이 보는 것이 서툴다며, 측은해하며, 아이를 받아서 안아 주셨다.
양구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20여분 걸어서 면회 대기소에서 면회를 신청했다. 면회 대기소는 처음 자대 배치를 받고 어머님이랑 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남편이 빨리 나와야 숙소를 정하고, 아이를 맡기고 춘천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지만, 남편은 면회신청을 한 지 2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부대를 벗어나 훈련을 간 것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면회소의 사병에게 다시 확인해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병의 목소리를 들은 지도 30분이 지났는데도 남편은 나오지 않았다. “ 안 나오면 내가 시험을 못 보러 갈 줄 알아?” 하며 오기를 부리며 대기소 문을 빵 걷어 차고, 읍내로 향하는 버스 정류소로 향하였다. 양구 면회소까지 오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이가 등에서 울기 시작하고, 나의 얼굴은 봄햇살에 벌겋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도로 집으로 가야 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군인 한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다가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남편이었다. 남편은 대뜸 나를 보자마자 3일 후면 휴가를 가는데, 왜 왔느냐며 반가움은커녕 서운한 소릴를 해댔다. 사실은 내일 시험을 보려고 아이를 맡기러 왔다. 하룻밤만 봐 달라 했다. 그랬더니 내가 제대 후 굶겨 죽일까 봐 시험을 보러 다니냐며 화를 내면서 시험이고 뭐고 다 걷어 치우고, 여기서 하루 지내고, 낼 서울 처제한테 가 있으면, 3일 후 휴가 받는 날 서울로 데리러 가겠다며 이야기를 했다. 그 대신 아이는 절대 안 봐준다고 했다.
남편 말대로 시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억지로라도 아이를 맡기고 시험을 보러 가야 하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관방으로 들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