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군대를 가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다 직장을 다녔다. 그동안의 생활은 시부모님 그늘로 안전한 생활이었다. 직장을 잡고, 혼자 분가를 먼저 했다. 그 후 어린이집을 섭외한 후 아이와 단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혼자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 무척 힘이 부쳤다. 직장 초기에는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직장에 쉬겠다는 말도 못 했다. 회식에도 매번 불참했다. 회식에 참석하더라도 중간에 슬그머니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런 나에게 담당과장은 회식도 엄연한 직장생활이라면서 훈계를 하셨고, 회식에서 일찍 돌아가는 사람은 인생에서도 빨리 가게 돼있다며 악담을 했다. 인생을 빨리 하직하는 한이 있어도 집에서 혼자 나를 기다릴 아이를 생각하니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말은 아직까지도 비수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쌀 한말과, 수저세트 2벌, 밥공기, 대접 등 2개씩과 현금 14,000원을 받아서 분가했다.
월세방은 방하나에 부엌 하나 있는 집으로 주인댁과 바로 붙어있어 사생활은 그대로 노출되는 곳이었고, 슬래브집인 월세방은 겨울에는 온도차가 샘 해서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고,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그릇들이 서로 엉켜 붙었다.
당시 월급도 채 20만 원이 안되었는데, 아이와 생활하다 보면 빠듯하였고 직장 내에서는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찍혔다. 생활고와 힘든 직장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안 좋은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친정어머니 말씀처럼 내 눈 내가 찔러 고생을 하는 건데도 말이다.
약방에서 수면제를 사 모았다. 수면제가 20알이 되자 나는 소주 한 병에 수면제를 털어 놓고 죽으려고 했다. 약을 먹은 후에는 기억이 없었다. 깨어나 보니 동생들이 달려와 있었고, 그나마 옆에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을 각오를 하면 뭔 일인 듯 못 할까.. 하는 생각보다 나아지지 않는 환경에 더 절망했다. 힘든 생활은 계속 시작되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떼어 놓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결혼한 나에게 " 집 근처에는 얼씬 거리지도 말라"는 이유를 들은 탓에 힘들어도 내색도 못하고,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도 없었다
아이가 겨울방학이 되자,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동생이 부모님을 설득하여, 방학 동안만이라도 아이를 친정집에 맡기게 되었다.
주말을 맞아 아이를 보러 친정을 갔다.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 엄마가 보고 싶으냐"" 물었더니, " 엄마 보고 싶은데, 말을 하면 엄마가 더 힘들어진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겨우 4살밖에 안 된 아이가 자기 자신보다 엄마를 더 걱정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힘든 내색을 안 한다고 해도 아이의 눈에도 힘들어 보였던 것이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 모두가 아이에게 상처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어떤 고난이 닥쳐도 내색하지 않고 잘 견디어 내고 살았다. 그런 딸이 이젠 커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내 앞에서는 한 없는 어린애지만 내가 지치거나 힘들 때 딸아이에게 전화한다.
“ oo야,” 부르면 바로 “ 엄마 ~~” 하는 소리만 들어도 힘이 나고 힘들었던 상황을 다 잊어버린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나를 위한 보상이 바로 딸에게 전화 거는 것이다. 그럼 딸이 “ 엄마 ~~”하면 그걸로 나는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