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속초순보기 Jan 01. 2024

내 인생의 가치는 어머니에게 배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을 해준 사람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육 남매의 막내셨다. 6. 25 전쟁 전에는 양양이 삼팔선 이북으로 북한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수복되면서 어머니와 외할머니 두 분만 남게 되었다.


어머니 형제 6남매 중 외할머니와 어머니만 양양에 남게 된 것은 외삼촌께서 양양에서 원산까지 운행하는 기차의 기관사였는데, 한국전쟁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국전쟁 초반에 외할머니께서는 모든 자식을 큰아들인 삼촌에게 맡기려고 원산으로 보내려고 했다.  할머니의 생각에는 금방이라도 기차를 타고 아들네 집인 원산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는데, 결론적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조차도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당시 역까지 나갔다가 외할어머니 손을 놓지 못해 (막내였기에) 돌아왔길 망정이지, 지금생각해도 끔찍하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이모와 혼담이 오고 갔다고 한다. 이모는 수수한 옷차림에도 외모가 빛났고, 무심한 듯 깍쟁이였기에 이웃 총각들이 주위를 맴돌았는데, 혼담이 오고 가자 아버지는 내심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이모가 원산으로 가게 되자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짐작건대 집안끼리의 약조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다.



결혼 이후 시댁으로 들어가 신접살림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댁식구들에게 설움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어린 내가 보아도 이것은 아니다 할 정도로 심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구박은 점점 심해졌다. 6살 때쯤인가 어머니가 이야기도 통하지 않는 나에게 시집살이의 설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댁식구들의 언어폭력이었다. 아니 언어의 강도였다.


바닷가가 근처인 사람들은 거친 파도와 상대를 하면서 살아온 탓인지, 말이 거칠었는데 아버지 가족들은 특히 심했다.  고향은 같지만 아버지는 바닷가 근처이고, 어머니는 조금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도 언어의 억양과 쓰임은 완전히 달랐다.


어머니가 시댁 식구들로 받은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이 언어였다.  부드러운 말투와 상스러운 말은 전혀 쓰지 않았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 가족은 거친 언어가 난무했다. 일상적인 언어에서 조차 거친 말투가 오고 갔다.


어머니는 거친 말투를  당신 자식들이 보고 배울까 봐 가장 두려워했고,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사람의 품위는 말투에서 나온다며 절대 따라 하면 안 되며, 듣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형제는 8남매로, 나이 터울이 2살이나 3살 터울로 고만고만하여, 자주 싸우기도 하고, 장난을 심하게 쳤다. 하루라도 싸우지 않거나, 토닥거리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우리는 거친 말이나 쌍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고, 얼마간은 어머니의 교육 탓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입학을 하고 교과서를 받아가지고 온날이었다. 학교 들어가서 책을 처음으로 보게 된 나는 신기하여 책장을 몇 번을 넘겨 보기를 반복했다. 동생들에게도 보여주며  나중 네가 학교에 들어가면 잘 쓰고 물려줄 것이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물론 어머니께서도 교과서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담장 밖으로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려고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책보를 펼쳤다. 맨 위의 교과서를 꺼내 휘리릭 책장을 넘겨보고, 중간에 있는 책을 들어 넘기기 시작했다. 휘리릭 넘어가던 책갈피 속에서 작은 종이 조각이 툭하고 떨어졌다. 떨어진 한 귀퉁이에서 영희의 다리가 보였다. 교과서의 한 페이지 오른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 순간 눈이 뒤집혔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동생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동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모든 욕이 봇물 터지듯 다 쏟아져 나왔다.


그때 부엌과 안방사이에 있던 장지문이 벌컥 열리며 무서운 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다음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의 손으로 손에는 회초리가 들려져 있었다.


큰일 났다 싶었다. 일단 우는 방법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다 싶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점점 커서 악을 쓰는 정도로 커졌다.


어머니는 전후 사정을 듣지도 않으시고, 종아리부터 걷으라고 했다.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쭈볏쭈볏 동생의 얼굴과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어 가며 쳐다보았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달라는 의미를 섞어서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동생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무리 공부해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 학교 다닐 이유가 없다" " 욕을 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잘 찢어 버렸다"  한대, 한대, 가중되었다.


교과서를 찢은 건 동생인데 왜 내가 맞아야 하는지 억울하다며 대들다 한대, 왜 나만 혼내는 거냐고 따지다 한대,  독 쓰다 한대, 씩씩 거리다 한대...


" 나중에 동생이 학교 들어가면 교과서를 똑같이 찢어 놓고 말테야" (물론 속으로만)


. " 앞으로 욕을 할래? 안 할래?" ",,,,,"


 " 배운 대로 해라 "  람은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려면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때도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말이 " 배운 대로 해라!!"였다. 그래서 손해를 보기도 하였고, 사기를 당한 적도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늘 어머니의 말씀대로 경우대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어머니는 예전의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이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까막눈이고 세상물정에 눈이 어두웠어도 내 인생을 사는데 가치를 알려준 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하루만 주어진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