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변명하다
1. 개념의 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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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편 중에 [에우튀프론]이 있다. 내용은 위와 같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갇혀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에 에우튀프론은 수건을 던진다.
한국 교인들에게도 이러한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데, 그러질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 교인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 중에는 바로 그들의 잘못된 개념의 혼동 때문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믿음, 소망, 사랑, 복, 형통과 같은 개념들을 교회 밖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성경적인 게 살짝 가미된 채 교회 밖으로 나가 적용하다 보니 문제가 일어난다. 즉 귤이 탱자가 되어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탱자는 다시 금귤이 되어 교회 밖으로 나가는 셈이다.
2. 교인의 무지.
개혁주의 신학자 코넬리우스 반틸은 믿음의 내용을 세상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한국 교인들에게는 무리다.
우선 성경에 나오는 개념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판에 신앙의 내용을 다시 세상의 언어로 풀어 설명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인 셈이다.
그보다도 자신이 알고 있는 믿음에 대한 바른 신앙관을 갖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는데, 그조차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성욱 교수의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이라는 책에서, <종교개혁의 거울에 비춰본 한국교회의 현주소>로 꼽은 아홉 가지 중 대부분이 바로 교회 내 교육 부재에서 나타나는 문제라 하겠다.
성장 중심의 외형을 추구하다 보니, 정작 추구해야 할 성도들의 내실을 키우는 데에는 소홀한 측면이 많았었다. 결국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교인들을 양산한 것이다. 교인도 아닌 것이, 세인도 아닌.
3. 교회의 유교적 문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교적인 단체나 집단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교회를 꼽겠다. 정성호 교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부 한국교회에 팽배한 계급주의 일면은 다음과 같다. 목사는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가장 높은 계급에 속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전권대사 또는 구약의 제사장 같은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일부 목회자들 스스로 그렇게 믿고 가르치고 있을 분 아니라 무속적인 신앙에서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성도들이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위의 1번의 연장 선상에서 보면, 이 역시 교회 밖의 개념과 교회 안의 개념이 묘하게 짬뽕되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된 결과다.
이런 사고방식은 성과 속이라는 두 가지의 양분법적 사고를 낳는데, 성직은 성스럽고 성직이 아닌 일반 직업은 성스럽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신학이나 교리는 신학생이나 목사나 하는 것이지, 교인은 굳이 그런 것을 배울 필요도 없고 배워서도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목사에게 가장 만만하고 다루기 좋은 신자는 무지하여 자신만 추종하는 신자다. 그러니 목사가 배설물을 먹으라고 하고, 때리기까지 하는데도 교인들이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설과도 배치되는 생각이다.
3. 결론
이 책에서도 말하는 것이고 필자도 공감하는 것은, 우선 목회자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상황으로는 요원한 것으로 보이기에 다음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교인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앞엣 것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는 현실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생각해 낸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 안의 개념을 공부하여 교회를 향하여 성토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비신자에게 신학을 권하는 이유다. 그대가 싫어하는 교인과 교회들을 하루빨리 이 땅에서 보지 않는 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