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신학을 권하는 이유
20세기 철학 사조인 현대 철학은 헤겔의 관념론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헤겔의 이성주의적 ‧ 사변적(思辨的) 형이상학의 방대한 체계는 외면받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현상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세계가 이성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에 반대하여 세계의 본질이 비합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반이성적인 삶을 중시한 비합리주의적 경향입니다.
또 하나는, 절대자라는 형이상학을 버리고 칸트의 인식론으로 돌아가자는 비판주의적 경향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사변적 인식론을 배격하고, 경험적 사실만을 중시하려는 실증주의적 경향입니다. 비합리주의적 흐름은 생의 철학과 실존철학으로, 비판주의적 흐름은 신칸트 학파와 현상학파로, 그리고 실증주의적 흐름은 실용주의 ‧ 분석철학 ‧ 마르크스주의로 발전하였습니다. 진 윌렌스타인은 『쾌감본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어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진리는 감정적이든 도덕적이든 미적이든 지적이든 모든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경험은 말로 표현하면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언어는 단지 하나의 묘사 형식이고, 비유를 통해서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부득이하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표상 체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의 소리를 성공적으로 해독한다고 해도, 그 주장에 따르면 언어는 진정한 객체가 아니라 단지 현실의 거울이고 동물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이것을 표상문제-언어 같은 기호가 어떻게 감정과 생각 같은 주관적 경험을 지도처럼 나타내는가를 해독하는 문제-라고 부른다.
따라서 현대철학은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철학입니다. 최근의 철학에 와서는 원리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성질들을 어떤 거대한 틀로 환원시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철학사가 진행되면서 그 안에 등장했던 모든 원리들이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면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곤 했습니다.
현대 철학은 과거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철학적 사유가 진행되면서, 세계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점차 우리의 감각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맛, 온도, 색깔도 노모스의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대한 이러한 불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참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과 함께 참된 것 자체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이 등장할 태세였기 때문입니다. (로저 트리그, 최용철 역,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 간디서원, 2003, p32~33)
관습(nomos)은 의견(doxa)과 비슷하게, 지방과 종족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며 어느 한 지방, 한 부족, 한 시대에 통용되는 관습은 다른 지방, 다른 종족, 다른 시대에는 허구적입니다. 희랍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유달리 훌륭한 관습 및 사회적인 기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폐쇄적인 시대에서 개방적인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관습은 허구적임이 드러났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철학의 역사란 거대 이론의 구축과 그에 대한 해체가 길항(拮抗)을 겪어 온 역사입니다. 그들은 보편적 원리의 집착은 개별자들의 소외를 가져온다고 본 것입니다. 때문에 현대 철학은 법칙적 추상성이 개별적인 구체성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보편성과 법칙성을 단적으로 부정할 때 우리는 세계에 대한 넓은 이해, 삶에 대한 일반적인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길은 보편과 개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원리의 거부에는 유럽중심, 백인중심, 남성중심 등의 ‘중심주의’의 거부하는 ‘탈중심화(脫中心化)’의 사유와 관련됩니다. 현대 철학은 전통철학의 위계적인 사유, 즉 중심을 잡아놓고서 모든 것을 피라미드처럼 정리하는 사유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다중심적(多中心的)이고 상호적인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런 현대 철학이 “철학의 사유적 자율성”을 말해도 유독 기독교 철학만은 부인하는 것은 현대 철학이 부인하는 초월적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현대 철학은 형이상학을 부인하고 오직 경험만을 추구합니다. 철학이 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주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매우 긴박한 형태로 새롭게 제기된다고 하더라도 초월을 배제한 현대 철학은 한계를 갖고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화란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론적 사유 태도 자체에 대한 초월적(transcendental) 비판만이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다. 이 초월적 비판이란 오직 이론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이론적 사유 자체의 내적 구조와 본성이 요구하는 보편적으로 참된 조건에 대한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탐구라는 뜻이다.(헤르만 도예베르트, 신국원 ‧ 김기찬 역, 『서양 사상의 황혼에서』,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17)
기독교 철학과 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초월적 시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지식은 신학과 인문학으로 나뉘어진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지식은 각각의 지식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지식입니다. 인간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으로 이끕니다.
현대 철학은 내재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초월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초월을 버렸으니 명성 판명을 가늠할 준거를 잃었습니다. 현대 철학이 초월을 내던지니 사람들은 힐링이라는 피안을 찾습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다시 힐링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초월적 시각에서 본다면 두 가지 모두 균형과 방향을 잃었습니다. 힐링을 싫어한다는 철학자의 말은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을 줍니다. 왠지 삶과 절연된 느낌.
현대 교회는 구원이 갖는 초월적 시각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는 게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참 뜻은 이 땅에서 초월적 존재로 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현실에 침몰되거나 격리된 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었으니 이 땅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써 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초월적 관점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한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이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일체의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은 삶의 현실을 외써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초월적 시각을 말해 줍니다.
초월적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초월적 시각은 기독교만이 줄 수 있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 참고도서-
정진일, 『철학개론』, 박영사, 2008, p137
이정우, 『개념-뿌리들』, 철학 아카데미, 2004, p46~49,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