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신학을 권하는 이유
솔직히 말하겠다. 위의 책들 중 안 읽은 책이 절반이다.
그래도 말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어거스틴을 배우라고.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거친 충동이 모든 광대한 행위와 함께 깨어나 / 인간의 사랑이 자극받고 신의 사랑 또한 그러하네> 제1부의 마지막에는 두 명의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엑스타티쿠스 신부와 세라피쿠스 신부입니다. 전자는 사랑이 절정에 이르도록 인간의 내면을 다스리는 불타오르는 자로서,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쿵쾅거리는 인물입니다. 이에 반해 후자인 세라피쿠스는 마치 밀물 위에 떠 있는 무지개처럼 공중에 부유하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며 사태를 조용히 관망합니다. 이 경우 무지개가 중요할 뿐, 밀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기한 대립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의 출발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그에게는 내적으로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파헤치려는 특성이 엿보입니다. 가령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시켜 이해할 때, 논리적 인식의 어떤 성향을 파악하려 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특성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자의에 의해서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어떤 논리를 인식할 때, 그는 의지의 격정적 특성을 노출시킵니다. - 에른스트 블로흐의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 중에서
중세 철학을 모르면서 인문학을 논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을 모르고 중세 이후를 논할 수 없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의 사이에서 이 둘을 연결하는 자리에 위치한다. 어거스틴은 그 시기 시간에 대해 철학했다. 이후로 존재와 시간에 대한 사색한 철학자들이 있는데,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한 하이데거도 그중 한 사람이다.
영미 문학 평론가 헤럴들 불룸은 [세계 문학의 천재들]에서 어거스틴을 최초의 심리학자로 묘사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이후의 심리학자들도 어거스틴의 후예요, 그의 젖줄에서 나온 셈이다.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 학위 논문의 제목은 <프르탱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본 헬레니즘과 크리스차니즘의 관계>다. 카뮈 논문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어거스틴은 헬레니즘과 크리스차니즘이 만나는 삼각주다. 그런 매력이 그에게 있다. <괴테> 뿐만 아니라 찾아보면 다른 고전에도 어거스틴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런 이해를 바탕을 갖고 그런 텍스트를 대할 때는 모르고 대할 때와는 다른 유익이 배가 된다. 어거스틴을 공부하는 유익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