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니

올베르스의 역설

by 간서치 N 전기수

주변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지식 유무에 관계없이 계시에 대한 은연중의 언급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 기사도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는 하나의 선례라고 봅니다. 한 번 보시죠.


(전략) 구글의 독과점 행위를 증명하는 일은 엄청나게 어려울 것이다. 우선 구글의 사업 모델은 단순하지만 실무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저자 강조). 키워드별 광고료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시스템은 세계 최대 규모의 컴퓨터 센터에서 관리하고, 프로그램은 내로라하는 천재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한다. 누가 감히 이를 해독할 수 있겠는가? (후략)


자! 기사의 내용을 이러합니다. 검색 시장의 선두 주자인 구글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그들의 불법 행위가 있는지를 밝히려 한다는 기사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정작 기사에서 기자는 미정부가 구글의 독과점 행위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기 보단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글의 사업 구조는 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보이지 않는 면에는 천재 프로그래머들이 최첨단 시스템으로 설계한 시스템이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들이 영화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거북의 등의 형상을 따라 펼친 구궁팔괘진과 흡사한 시스템일 것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온 침입자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진의 모습에 우왕좌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개발한 시스템을 인간이 해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은 내로라하는 천재 프로그래머들이요, 그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또한 최첨단 최상급의 기자재들의 집합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상대하는 미 정부 요원들의 실력이나 장비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병법에 능하지 않더라도 성을 공격하는 것은 성을 지키는 것보다 몇 배의 인원과 물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어찌보면 기사의 시니컬한 어투는 미노스의 미로의 비밀을 파헤치려면 그 안에서 길이라도 잃지 않게 실타래라도 준비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여러분은 이 기사에서 혹시 어떤 특별한 신학적 개념을 찾으셨습니까? 좀 달리 말해서 존 칼빈이 ‘종교의 씨앗’이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것을 말이죠. 필자가 보기에는 이 기사에서 기자는 시나브로 성경적 가치관을 내뱉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치를 체셨습니까? 어쩌면 필자의 억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기사에서 한 가지 성경의 진리를 읽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 11장 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괄호 안에 믿는 것은 저나 여러분 같은 기독교인들이 철두철미 하게 믿는 것 입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하나님은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대로 세상을 붙드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라도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은 바로 하반절 말씀에 나타난 진리입니다. 바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바로 필자가 갖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키워드이자,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필자가 어떻게 이런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지만 여기서는 건너뛰고 다음 지면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주제어를 되뇌입시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다시 한 번 기사를 떠올립시다. 구굴의 시스템은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면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는 미로 같아서 실이라도 붙잡지 않고 들어간다면 나오는 길조차 못 찾고 그 안에서 굶어 죽든지, 늙을 때까지 헤매일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단초를 얻습니다. 이 또한 성경의 말씀과 동일한 교훈입니다. “외모로 대상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 말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그래서 무시해도 좋을 말씀처럼 들리십니까? 그럼 다음의 이야기에는 그 생각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다는 이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의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을 하게 된다.……삶의 문제에 직면해서 해결하는 과정은 삶 그 자체의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어렵다.……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삶이란 항상 어렵고 기쁨만큼이나 많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은 필자가 성경 외에 권하는 책들 중에 한 권입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동서고금의 가르침과 함께 삶은 문제투성이이며 인생은 바로 그 문제 해결의 연속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천로역정에 들어선 인간이 시시각각으로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서 회피할 때에 다음의 상황에 쳐할 것을 엄중 경고 합니다.


우리는 문제들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만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 태도가 바로 정신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을 드물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와 고통스러운 것을 피해 쉬운 길을 찾으려다가, 오히려 건전하고도 지각있는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환상에만 안주하여 현실을 도피하기도 한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만 하는 것은 없는 지를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삶에는 본질적인 것이 있는 반면에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삶의 본질적인 것에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등일 것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삶의 비본질적인 것은 나는 무엇을 하며 누구랑 살 것인가? 등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본질과 비본질은 절연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상호 연관된 것이니까요.


달리 말하면 전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후자는 보이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보이지 않는 전자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싯다르타는 구도의 길을 나섰습니다. 지금도 이따금 해외 유수의 명문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구도자의 길로 들어갔다는 기사를 가끔 접하게 됩니다. 앞에서 소개한 마티유 리카르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보이는 것 속에 살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보이는 비본질적인 것을 다 버려야 하나하는 질문입니다. 필자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스캇 펙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약한 배움으로는 부분적인 문제밖에 해결하지 못하며 혼신의 힘을 다한 배움만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 ․ 정신적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도리어 직면해야 할 고통을 회피하려 했을 때 노이로제(신경증)에 걸리게 됩니다. 결국에는 피하려 했던 고통보다 피하려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럽게 됩니다.


문제 해결에는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기에 직면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물이 됩니다. 이 말은 모든 믿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교훈입니다. 문제는 신자든 불신자든 이 교훈을 간과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keyword
이전 28화관을 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