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을 짜라-11-
흔히 철학을 판단이나 행위의 원칙을 의미하는 가치관 자신을 포함하여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 세계관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되는 사고 원리가 있다.
먼저 가치관, 세계관이기 위해 관점의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중략) 가치관은 사고와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자신이나 타인 혹은 어떤 집단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사고를 의미한다. 철학적 사고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일관된 관점을 포함한다. 절대적인 기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적용은 아니더라도 또한 중요한 변화나 인식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일정 기간 내에서 갖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필요로 한다.박홍순, 『생각의 미술관』, 웨일북, 2017, p54
이 책의 제목인 “관을 짜라”는 문구를 보고 어떤 관(棺)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만일 사람이 죽고 나서 들어가는 관(棺)을 생각했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떠올린 관은「널 관(棺)」자를 생각한 것이다. 이 한자가 들어가는 말로 관곽(棺槨)과 관재(棺材)가 있다. 관곽은 시체를 넣는 속널과 겉이고 관재는 관을 만드는 재목이다.
행여 필자가 말하는 관(觀)을 관(棺)이라고 하여도 꼭 틀린 것은 아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세계관의 부재는 그들 모두를 관(棺)에 눕게 하기 때문이다. 또 관(觀)을 관(棺)으로 잘못 오인하는 것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문학적 통찰의 요소를 담도 있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는 인문학적 통찰을 바로 ‘죽음’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일’이 “툭!“하고 경험되는 거라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명사가 갑자가 동사가 되어 자기에게 파고드는 경험. 쉽게 말에 관(棺)에 누워 보는 경험이 인문학적 통찰을 낳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죽음’에 매달리지 말고 ‘죽어가는 일’을 응시하라고 권한다. 따라서 필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자만, ‘관’이라는 말에서 사람이 죽는 ‘관’을 떠올렸다 해도 통찰은 발생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은 사람이 죽어서 눕는 관(棺)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관’(觀)을 말한다. 관광(觀光), 관념(觀念), 관망(觀望), 관찰(觀察)이라고 할 때 들어가는 ‘볼 관’(觀)이다. “관을 짜라”는 말은 죽을 때 눕는 관을 짜라고 겁을 주는 게 아니라 “세계관을 짜라”고 권하는 말이다.
한편으로 “관(觀)을 짜라”는 말은 동시에 “관(觀)을 가져라”라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굳이 관을 가지라고 하지 않고 관을 짜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관(棺)을 짜서 맞추듯이 관(觀) 또한 ‘짜 맞추라’는 말이다. 죽을 때 눕는 관(棺)이 밑판과 옆판과 덮개로 이루어져 있듯이 관(觀)도 각각의 세 판으로 짜보라는 말이다.
흔히 관에 누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겉보기와 달리 안락하다고 말한다. 모 여배우는 방송에 나와 관에 누워서 자곤 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녀는 몹시 편안하다고 했는데, 필자도 공감한다. 과거 기독교 수련회에서 천로역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관에 눕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항상 관(棺)을 들고 다니며 안락함을 느낄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관(棺)대신 관(觀)을 갖고 있어도 그런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관(觀)은 또 자동차의 에어백 같은 든든함이 있다. 또 고 박이문 교수님은 『철학의 흔적들』이라는 책에서 “세계관은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네비게이터”라고 하셨다. 관이 뭐라고 그런 안락함을 주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일까.
그러면 앞에서 스캇 펙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했을 때,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불안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불안을 다루는데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정신과 의사 김현철 님은 『불안하니까 사람이다』에서 말한다. “우리 또한 힘든 상황에서는 두려움이나 불안 없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비겁하다거나 겁쟁이라는 얘기를 듣기 싫어하는 소심함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내면의 불안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겨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불안을 느끼고 껴안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삶이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에서 박찬국 교수님도 니체가 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통과 고난이 없기를 바라기 보다는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필자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살아보니 ”삶은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문제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전해지는 충격의 강도는 다르다. 자동차가 범퍼와 에어백으로 충돌 시 충격을 완화해 준다면, 인생에서는 그대가 갖고 있는 관(觀)이 삶에서 겪는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 또 길을 안내해 준다.
그래도 아직까지 세계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세계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쉽게 쓰인 책을 도서관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 책에 나오는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사람과 세계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이 사실은 일상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잖니?……“세계란 무엇인가?”, “세계와 사람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등등 세계에 대한 견해를 세계관이라고 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건 모르건 나름대로 이런저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야.……앞에서도 말했듯, 사람과 세계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인생 문제나 그 밖에 여러 문제를 고민할 때 세계를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어. 때문에 세계관은 인생관, 가치관, 행복관, 도덕관, 자연관, 사회관, 애정관 따위의 다른 모든 견해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게 되는 법이야.위기철 지음, 정우열 그림, 『철학은 내 친구』, 청년사, 2008, p33~34.
내용으로 짐작했겠지만, 어린이를 위한 철학 책에 설명한 세계관에 대한 내용을 옮겨 보았다. 놀랍지 않은가. 아이들이 보는 책에 세계관을 설명해 놓았다. 과연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세계를 알까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도 세계관에 대해 배운다. 책은 “사람은 세계에서 태어나 세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나 알게 모르게 나름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갖고 살아가는 세계관에 아이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세상을 모를 나이인 아이들이 왜 철학책에서 세계관을 배울까? 이유는 이렇다. 누구나 저마다의 세계관, 달리 말해 개똥철학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다 해도 감정이나 상식에 따른 세계관은 체계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대할 때마다 달라지는 세계관으로써는 인생이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세계를 다루는 과학만 해도, 생물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이처럼 다양한데 그 많은 분야를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은 어떻게 다 안다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이 책에서도 말하는 대로,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세계에 대한 세세한 지식들을 미주알고주알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탐구하는 건 세계를 보는 관점과 방법, 그리고 세계 전체에 걸친 법칙과 원리들이다. 이런 원리는 어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온갖 이즘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다. 즉,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설명하려 몰두한 끝에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만들어 놓은 이즘은 도리어 인간의 생각을 옥죄어 사회를 부자유하게 하곤 한다. 그러한 구속에 저항하거나 분개한 인간은 또다시 새로운 이즘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이즘이 많을수록 시즘(schism:분열, 분파)도 많아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궁극적인 인간 진보의 변증법이 아닐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이다. 세계관은 철학이나 과학과 흡사하지만,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나 이즘들을 전부 알 필요는 없다. 필자 또한 그에 대한 철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지식이나 식견은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이십대 초반부터 철학에 관심이 있다가, 삼십대에 들어와 그리스 철학에 대해 좀 더 깊이 알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들에 대해서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조금씩 맛만 보았을 뿐, 잘 알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필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게 되어,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도 필자처럼 세계관에 관심을 갖고 보다 감정과 상식을 뛰어넘은 세계관을 갖기를 바란다. 아이들도 배우는 세계관이다. 적어도 어른인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욱 깊고 체계적으로 세계관을 배워야겠다.
그래도 여전히 세계관은 사치스러운 말장난으로 들린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얼어죽을 세계관은!�이라는 생각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옳은 말이다. 그런 인생들에게 세계관은 사치처럼 보인다. 그래도 어쩌랴. 세계관은 그래도 필요한 걸. 왜 그럴까? 한 번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어느 날 초췌한 몰골의 남성이 경찰서를 찾았다. 가방을 잃어 버렸으니 찾아달라고 하였다. 경찰은 ‘노숙자가 잃어버린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다고 찾기는’ 이렇게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놀라웠다. 경찰이 찾아준 그 노숙자의 가방에는 500만원 넘는 현금과 패물이 들어 있었다. 노숙자에게 그런 고액의 현금과 값비싼 물품이. 훔친 것일까? 훔쳤다면 도둑이 제 발로 경찰에 신고할 일이 없지 않은가.
알고 보니 그는 부모로부터 수십억 원 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산가였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경찰도 그의 계좌를 확인한 결과 50억 원 가량이 입금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가 한 달에 받는 이자만 1000만 원이 넘는다. 그렇다면 50억 원 대 자산을 가진 A씨는 왜 거리를 전전할까.
그는 젊은 시절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은 후 한때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했다. 오랫동안 변변한 직업 없이 지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사지 않았다. 세상살이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호텔이나 모텔에서 자면 감옥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노숙이 제일 편했다. 그는 지난해 초부터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은행에 맡기고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기적으로 받는 이자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가끔씩 꺼내보았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다. 새벽에는 공원에서 운동을 했고 저렴한 음식을 사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 가슴 철렁한 경험이 그에게 준 변화는 고액의 현금이 담긴 가방이 현금 카드로만 바뀐 것이었다.
그런 황금 노숙자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필자는 바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세계관 혹은 가치관 때문으로 본다. 아니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갖고 있지 않거나 매우 낮은 수준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설령 그가 물려받은 유산이 많더라도 노숙자의 세계관 부재요, 가치 부재의 상태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겉으로 갖고 있는 가치와 그가 안으로 갖고 있는 가치의 괴리가 납득하지 못할 삶을 가져왔다. 한마디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하게 볼 부분이 있다. 우리는 부의 소유가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줄 것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래서 인생 역전을 꿈꾸며 로또 복권을 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부자 노숙자의 경우는 어찌 된 일인가. 그가 받은 많은 유산도 노숙자의 삶에서 그를 구제하지 못했다. 단지 그가 소유한 많은 유산은 단지 고액의 거치식 보험 일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나 가치도 없다. 흔히 “돈이 힘이다.”고 쉽게 사람들은 말하지만, 정작 그 힘은 소유한 사람의 의식 한계를 넘지 못한다. 이 경우, 자신이 소유한 물질과는 무관하게 의식적으로 정한 자기 한계가 무의식까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역으로 의식이 무의식화인 셈이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부가 아니다. 자기혁명이다. 이 혁명은 밖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한다. 시골의사 박경철 작가는 혁명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주하려는 인간의 속성과 달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는 것들에 대해 자신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서슴없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것, 새로운 사람,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것을 타파하는 행동이 바로 혁명성이며, 그것을 행한 결과가 바로 혁명이다.
사람의 감정이 몸짓과 춤으로 나타나듯, 사람의 생각 또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다. 그 부자 노숙자는 감정이나 상식에 따른 세계관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그렇다 해도 고액의 현금과 패물을 몸에 지니고 다닌 행동은 상식에조차 맞지 않다. 그는 단지 자신이 경험이 가져온 감정에 충실한 세계관으로 살았을 뿐, 정작 거기에 상식 수준의 세계관을 더한 것은 그의 가방을 찾아준 경찰이었다. 이런 사실은 고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끝이 불행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저들의 세계관으로는 감당 못할 번영의 위치 에너지가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p230 2013
아서 골드워그, 이경아 역, 『이즘과 올로지』. 랜덤 하우스 코리아, 2009, p15
2011년 9월 22일 동아일보.
박경철, 『시골 의사 박경철의 자기 혁명』리더스북, 2011, p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