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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N 전기수 Oct 18. 2020

나훈아의 테스형 가사 해설

테스형, 테스형 하길래 뭔가 싶어 찾아보니,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난 가황 나훈아 님이 콘서트에서 부른 노래 제목이었습니다.


가사를 한 번 보겠습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알고 보니 <테스형>은 소크라테스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전 공연을 보지 못해서 몰랐던 것이죠.

이 노래 가사의 이해를 돕고자, 전에 제가 작성했던 글이 있어 공유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 이성이든 경험이든 편협하지 않는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성을 소유한 인간의 내재성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소크라테스의 탁월함은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physis)이 관심이었다면,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노모스(nomos)로 관심이 바뀝니다.

이 부분에 대해 고대 철학사가 컨퍼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때까지 철학자의 시선은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주위의 ‘자연’이 변화하는 광경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추구하도록 외부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시각은 다른 분야, 즉 인간의 삶의 질서와 목적에 쏠리게 되었고, 특히 이 분야의 핵심 부분으로서 개인의 혼(魂)의 본성에 향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내가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바와 같이) ‘자연’을 발견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인간의 혼을 발견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를 두고 키케로는 천공을 향하던 철학을 우리 가까이 붙잡아둔 인물로 꼽습니다.

이런 철학의 변화는 영혼의 중요성을 가져왔습니다.

이전까지는 생명이나 호흡을 뜻하는 영혼도 이때부터는 사유와 행동의 주체로 개념이 정립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대의 영혼을 돌보라(Epimeleia heautou)"는 말로 인간의 본성이 영혼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과학적 사고가 “존재자에 관련된 모든 변화를 인과 법칙에 따라 보편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면,

바로 그 인과 법칙에 해당하는 “법”(法: <헬>nomos, <히> torah)에 대한 보편타당한 사고는 과학적 사고입니다.


법은 하나의 영향력(影響力) 있는 경향성(傾向性)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헥시스”(hexis)라 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비투스”(habitus)라고 하였습니다.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노모스에 대한 철학적 사유 안에서 인간 의지에 작용하는 “교만의 법”을 발견하였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그런 인간 의지에 내재한 교만을 경고하는 가르침으로써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곧 절제 또는 자제력을 가질 것을 훈계한 것입니다.그리고 그 절제와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교만을 행했을 때 “네메시스”(nemesis), 곧 징벌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는 바로 이 철학적 사유의 신격화입니다.이렇듯 그리스 신화는 단순히 신화 이상의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나오기까지는 “자연”(physis)를 철학 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유의 힘이 큽니다. 퓌지스에 대한 충분한 사유가 노모스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폭과 넓이를 더해 줬던 것입니다.



"사멸하는 모든 것들(pan to thnēton)"


곤란한 것은 인간이 고통이나 인류의 불행이나 사고나 또는 죽음 등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이런 온갖 관념에 익숙해질수록 계속해서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귀찮은 감수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이다. [루소]


플라톤은 서구 사상사에서 가장 거대한 기초를 놓은 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일반화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플라톤은 서양 철학사에서 고갱이입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초연한 태도는 결코 현실 감각의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꺼운 죽음에 대한 호소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죽음의 연습”인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든 덧없이 유전하는 비철 학적 현실을 떠날 때 비로소 철학적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는 현실 도피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이상주의와는 무관합니다.


쇠퇴해 가는 자연에의 관념이 우리의 모든 기쁨을 없애 버리고 말 것이다. 한 인간이 무덤을 향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느낄 수는 없으며 죽음의 모습은 모든 것을 보기 흉하게 만든다.-[루소]-


이와 같은 인간의 무력함 속에서 죽지 않는 신은 강력한 불사의 신적인 존재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불사의 존재와 죽어야 하는 존재 사이의 차이를 거듭 성찰해야 합니다.

거리 두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합니다.이런 의미로 델피의 아폴론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사멸하는 존재가 불사의 존재에 대한 간격을 두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찰할 때에라야 인간을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우리가 동원할 힘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무력한 존재,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살아있는 자 누구나 죽어야 하며

누구도 행복을 자랑할 수 없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여라.

어쩔 수 없는 일에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목적지를 향하는 순례자처럼 그렇게 가라.

세상은 여관이며 죽음은 여행의 끝이로다.


-존 들 아이덴(John Dryden)-


‘사멸하지 않는 신’과 달리 일반 동식물이나 인간들 같이 신체(sōma)를 가지고 있어 결국 ‘사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자를 의미하는 말인 ’사멸하는 것들(ta thnēta)'이라는 단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육체를 떠난 영혼의 피안에 자리한 이상향 속에서 정화(카타르시스)를 경험할 때에 인간은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혼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죽음을 훈련해야 한다는 놀라운 결론에 이릅니다. 한마디로 ‘철학은 죽음의 훈련’입니다.


현대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만큼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 도리어 노화와 그 끝인 죽음을 외면하고 피하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안티에이징’이라는 신조어가 그런 분위기를 설명해 줍니다. 내 얼굴이 주름 없이 동안이고 몸짱이면 죽음은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자들이 외치는 외침은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찰이 시작되고 철학이 생겨납니다. 죽음 대면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성장이 불가능하죠.


이 가을 나훈아 님의 노래 <테스형>을 곱씹어 보시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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