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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N 전기수 Jul 28. 2022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위한 그리스 철학 강의

히브리스, 소프로시네, 그리고 네메시스

거리 두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한다. 거리 두기는 세 가지를 포함한다. 첫 번째는 델피의 아폴론 신전의 현판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가 말하는 대로, 사멸하는 존재가 불사의 존재에 대한 간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들 사이의 간격을 지키는 것. 곧 부끄러움과 존경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개별적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 거리 두기가 욕망과 열정이 휩싸여 방종으로 치닫지 않게 해 준다.-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역, 『지중해 철학; Treffpunkt Platon』, 효형출판, 2007, p129-


절제 : 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를 ‘소프로시네(sophrosyne, 절제)’라고 부릅니다. 아폴론 상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소프로시네의 형상화입니다. 즉 적도(適度; metron)를 지키고 자제하는 삶의 형상화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수(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적도를 수적 비례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에게도 절제 있게 적도를 따른다는 것은 경계의 지킴을 의미합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히브리스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판단이 이성(理性: logos)에 의해서 최선의 것(to ariston)으로 인도되고 억제될 경우에, 이 억제에 대해 절제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반면에 욕망(epithymia)이 우리 안에서 비이성적으로(alogōs) 쾌락(hēdonē)으로 이끌리고 지배받게 될 경우에, 이 지배(archē)에 대해 ‘히브리스’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렇지만 ‘히브리스’는 여러 이름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갈래의 것이고 여러 부분을 갖기 때문이다. … 욕망이 먹을 것과 관련해서 최선의 것인 이성 및 다른 욕망들을 제압하게 될 경우에, 이는 대식(大食)이라 불리며, … 음주와 관련해서 욕망이 참주 노릇을 하며 이것에 사로잡힌 사람을 이런 식으로 이끌고 갈 경우에, 어떤 호칭을 얻게 될 것인지는 분명하다. -플라톤, 박종현 ․  김영균 역주, 『티마이오스』, 서광사, 2000, p22~23-


플라톤의 철학에서 절제에 대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만 무례함’을 뜻하는 ‘히브리스’(hybris)와 만납니다. ‘히브리스’는 ‘남의 권리나 명예 그리고 예절에 맞는 느낌과 관련해서 상대에게 치욕이나 모욕의 느낌을 갖게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던 옛말, 즉 “너 자신을 알라”(Gnōthi sauton)든가 “무엇이나 지나치지 않게”(Mēden agan)라는 옛말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과 관련되는 것들입니다. 


그건 인간인 주제에 인간의 분수를 지킬 줄 모르는 행위들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징벌이 ‘응분의 것을 되돌려 배분해 주는 것’인 ‘네메시스’(nemesis)입니다. 이게 신격화된 것이 ‘네메시스 여신’(Nemesi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율법(律法)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그 ‘히브리스’가 도덕적인 관점에서 문제 되는 것은 절제 또는 자제력(enkrateia)과 관련되어서입니다. 이는 사회적 ․ 국가적 규모의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이런 모든 ‘히브리스’는 '신적인 것'(theion)인, 이성(logos) 또는 지성(nous)이 그 주도권을 잃게 되어서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너 자신을 알라.”에는 “인간에게는 그런 신적인 것이 있음을 알라”는 뜻으로, “무엇이나 지나치지 않게”는 “자신 안에 있는 바로 그런 신적인 것이 이끄는 대로 따름으로써 지나친 짓을 삼갈 지니라”는 뜻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의 성향’이며 ‘신의 성분’인 이성 및 지성이 그 주도권을 회복해 갖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히브리스’를 인간 자신에게서 떨쳐 버릴 수 있게 해 주는 최선의 처방임을 플라톤은 역설합니다.




위의 글은 제가 그리스 철학에 빠져 있을 때 공부하고 정리한 원고의 일부입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고 세 가지 그리스 철학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절제를 뜻하는 소프로시네, 교만과 오만을 뜻하는 히브리스, 그리고 징벌을 뜻하는 네메시스입니다. 


소프로시네 하지 않고, 메트론에서 벗어난 히브리스는 결국 네메시스를 맞는다는 게 그리스 철학의 정신입니다. 쉽게 말해서, 절제하지 않고 적도에서 벗어난 교만은 징벌을 받는다는 거죠. 이 표현을 한국 속담은 더욱 짧게 압축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요.


히브리스를 향한 네메시스를 형상화한 이야기가 이카루스 신화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교만한 이카루스는 햇빛에 가까이 갔다가 촛농이 녹아 추락사하죠. 


요즘 왠지 시국이 적도에서 점점 벗어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걸 보시고 히브리스를 징벌하시는 네메시스 여신이 다시 활동하실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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