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 도대체 뭔데?

관을 짜라-9-

by 간서치 N 전기수

세계관이라고 말하면 왠지 거창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장 기초적인 가르침에서 세계관은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석가는 四海 가운데서 삶을 가장 큰 苦海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苦海)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삶이 고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 모든 사상에서 말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삶은 고통의 바다”라는 말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기본인 진리인 동시에, 가장 기본적 세계관이다.


스캇 펙 박사는 세상을 살아갈 때에 “삶이 고해”라는 세계관의 유무가 삶이 주는 무게감을 경감시키거나 가중시킨다고 말한다. 이유는 “이제야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그 이유는 뭘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다만 인식의 변화다. 단지 마음의 변화만 일어났을 뿐인데, 삶은 본래 고통임을 알 때와 모를 때의 차이가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물론 두말 할 것 없이 그 원인은 세계관에서 온다.


세계관이라……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고통까지 경감시킬까 싶을 것이다. 세계관은 모르핀인가. 아니면 에어백인가. 나는 세계관이 모르핀보다는 에어백에 가깝다고 본다. 아니면 세계관은 넘어질 때 충격을 줄여주는 유술(柔術)의 낙법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세계관에 ‘세계’라는 두 글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세계 전체에 작용하지는 않는다. 다만 세계관은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작용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주어진 현실을 해석하도록 도울 뿐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세상의 도전 앞에 응전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도록 해준다. 씨름판 앞에서 함성을 지른다거나 자기 얼굴을 때리는 선수처럼 다가오는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지혜를 가져다준다.


세계관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관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기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일관성이 있든 없든 간에) 일련의 전제들(참이거나 부분적으로 참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거짓일 수 있는 가정들)이다.


괄호를 빼고 읽으면 “세계관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기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다.”라고 축약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세계관이 참으로 거창한 무언가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세계관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관, 결혼관, 직업관, 사생관(死生觀)도 일종의 세계관이다.


이것들도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이성, 결혼, 직업, 삶과 죽음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관은 삶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이기도 하다. 앞서서 삶은 고통의 바다라는 생각도 삶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이렇게 우리는 잠시나마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세계관은 그렇다 치고, 그럼 인문학은 뭐지.”이다.


스캇 펙, 신승철 ․ 이종만 역, 『아직도 가야할 길』, 열음사, 2002

제임스 사이어, 정옥배 역, 『지성의 제자도』, IVP,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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