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을 짜라-11-
만일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두 지점 사이의 텅 빈 공간이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느끼고 살아가는가. 제임스와 나보코프가 말하듯이 우리는 현재를 오직 일정한 시간의 길이. 즉 ‘기간’으로 느낀다. 현재는 기간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불안하거나 초조해하는 것은 바로 현재가 텅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의식이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공간을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메꿔간다. 그리고 물론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이 불안을 메꾼다. 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어내고 고안한다. 기술 문명의 발달도 이런 일거리 가운데 하나다. 권택영, 『생각의 속임수』, 글항아리, 2018, p161
현재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두 지점 사이의 텅 빈 공간이라면, 그 지점은 조금씩 떠밀리다시피 옮겨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미래보다 과거의 시간이 더 길어진다. 그대는 그렇게 던져진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간다. 던져진 것은 퀘스트를 수행하라는 명령인가. 퀘스트는 불안을 낳는다.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메꾸려는 시도 중에는 인문학 열풍도 있었다. 지적 대화를 위한 인문학, 퇴근길의 인문학 같이 여러 종류의 인문학 서적이 출판되었다. 필자도 인문학 열풍의 대열에 동참 했었다. 그래서 『○○○ 인문학』 같은 책들도 여러 권 읽어 보고, 앞서 말한 자기계발서 성격의 인문학 서적은 물론, 큰 맘 먹고 고전도 찾아 읽어보았다. 하지만 철학적인 앎은 단편적 지식의 나열이나 총합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인문학을 소개하는 『인문학 스터디』 같은 책에는 ”인문학이 알고 싶어? 그럼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어봐“ 하는 식으로 책의 말미에 문학과 예술, 철학과 정치, 역사학과 기독교 사상의 고전 목록들을 가득 제시한다. 그 외에도 국내외 유명 대학은 물론 언론사에서 추천하는 권장 도서목록도 있다.
그렇다고 그 책들을 전부 읽기에는 가지고 있는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고맙게도 그런 독자를 위해 교양 있는 사람으로 지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넓고 얕은 지식을 제공해주는 호박 마차와 유리 구두를 제공해 주는 요정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정이 넘으면 마법은 이내 풀린다. 다시 넝마를 걸쳐 입은 나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남이 소화해 준 음식은 죽처럼 금새 허기를 지게 한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가 있다.
‘인문학, 그거 도대체 어디에 써 먹지?’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나.?’
물론, 공부는 꼭 어디에 써 먹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이왕 공부하는 거면 쓸모가 있으면 좋지 않은가.
그렇다고 목적과 이유도 모른 채 추천 도서들을 전부 읽을 것인가. 그럴 시간도 여유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 전부를 읽지 않으면 어딘가 찝찝하다.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많은 책들을 읽어는 데도 구슬이 꿰이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이 길이 아닌가벼” 하산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 한 번 도전해 봤다’ 정도로 스스로 자위할 것인가. 그런 인문학은 그저 ‘소비의 인문학’으로만 남을 뿐이다. 서가에 책들만 쌓이고 내 머릿속에 지식은 쌓이는데, 책상물림으로만 남게 될 뿐이다.
더욱 비극인 것은 갖다나 교육열 높은 학부모들이 아직 지적 성장이 완성되지 않은 자녀에게 또 하나의 과외 과목으로 인문학을 추가할 때다. 그래서 박민영 작가는 『인문 내공』에서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라고 까지 말한다. 야마구치 슈는 『독학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에서 인풋 과정에서 중요한 중 하나는 섭취하지 않을 지식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살면서 습득할 수 있는 한정되어 있는 만큼 취할 것과 취하지 않을 것을 정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대의 내면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노자의 『도덕경』 망지(忘知)편에는 “학문을 배우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18)
현대인들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인문학 외에도 알아야할 지식이 너무나 많다. 오죽하면 ‘무용지식’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엘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이건, 두뇌 속이건, 지식이 저장된 곳은 어디나 무용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변화가 빨라짐에 따라 지식이 무용지식으로 바뀌는 속도도 빨라졌다고 말한다.
그래서인가 현대인들, 특히 엄지 세대로 불리는 신인류들이 추구하는 지식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얻는 찰나적인 지식들이다. 책은커녕 잡지도 읽지 않는다. 잡지사 「샘터」지는 무기한 휴간을 선언했다. 배경에는 책이나 문자보다는 주로 검색엔진이나 유튜브를 주로 소비하는 청소년, 청년들의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 김용규 님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정보와 지식은 검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이런 현상은 국가의 공론장을 형성해 나가는데도 좋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 송호근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난 10년간 캠퍼스에서 종이 신문을 펼쳐 읽는 학생을 보질 못했다. 그렇다면 ‘저는 왕따입니다’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가끔 중대 기사를 엿보기는 하겠지만 매일 그러는 것은 아니다. 5000만 명의 공론장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만, 공론장에 나오기까지 그들은 각자의 정보 네트워크에서 평가 논리를 이렇게 저렇게 발전시킨다. 이런 이유로 공론장은 항상 들끓고 사안별로 분절된다. 개인적으로 여러 개의 정보망을 가동하고, 정보 유통이 빠르고, 쟁점 이동이 신속함에도 합의점을 도출하기는 어려운 한국은 정말 특이한 나라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이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취사선택이다. 취할 건 취하고 버리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런 안목은 어떻게 길러질까. 필자의 경험으로는 많이 배운다고 느는 건 아니었다.
땅을 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넓고 깊게 파기 위해서는 어떤 삽으로 파느냐도 중요하다. 모종삽으로 땅을 팔 수는 없는 일이다. 땅이 지식의 세계라면, 삽은 지식의 도구다. 『생각의 시대』라는 책에서 저자는 2,500년 전 그리스의 문명을 꽃 피우게 해 준 ‘시원적 도구’를 익히자고 권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원적 도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사고의 방법으로 사용한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모스(수), 레토리케(수사)를 말한다. 이 네 가지 사고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 문명은 꽃 피웠으며, 그 유산을 물려 받은 서구 문명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말인즉슨, 근본원리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모토는 ‘애드 폰테스(Ad Fontes)", 즉 “근원으로 돌아가자”였다. 마찬가지로 현대인들도 소화하기도 힘들만큼 인문학 지식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세일러의 말처럼 근본원리를 이해하고 경제지표 몇 가지만 익히면 경제적 판단을 내릴 수 있듯이, 몇 가지 세계관의 근본원리를 이해하여 사고 능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단 하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고 필자는 결코 지적 여정을 막는 게 아니다. 다만 무턱대고 지식을 쌓지 말고 세계관이라는 토대 위에 지식의 성을 쌓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세계관을 이루는 세 개의 판인 세계론과 인간론, 인식론이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 위에 지식의 성을 쌓자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박홍순, 『생각의 미술관』, 웨일북, 2017, p54
엘빈 토플러, 김중웅 역, 『부의 미래』, 청림출판, 2006
김용규, 『생각의 시대』, 살림, 2014
『서울대 송호근 교수의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 다산북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