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초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지키던 해병대 병력이 뚫리고 정승화 총장이 강제 연행된 것은 매우 결정적이었다. 당시 참모총장 체포조로 투입된 반란군이 소수의 해병대에게 기습 공격을 가했고, 전두환의 최측근들인 허삼수와 우경윤이 공관 안으로 들어가 정승화를 체포했다. 만약 공관 밖을 지키던 해병대 병력이 더 많았거나, 공관 안에 있던 정승화 측근들이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데 성공했다면 처음부터 반란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총리 공관 점령과 최규하의 미온적 대처
당시 반란군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머무르는 총리 공관을 무력으로 장악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반란군을 매우 유리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때 진압군이 총리 공관을 장악한 후 최규하의 신병을 확보했다면 반란 진압이 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최규하가 진압군의 설득으로 반란 진압을 단호하게 명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반란군이 먼저 총리 공관을 장악한 후 정승화 연행 결재를 압박하다 보니, 최규하로선 반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려웠던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최규하가 흔들리지 않고 '군통수권자'로서 전군에 반란 진압 명령을 하달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33 경비단 전차부대의 회군
영화 '서울의 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당시 장태완의 명령으로 수도경비사령부에 속해있던 33 경비단의 전차부대가 반란군 주요 인물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치기 위해 출동했다. 외곽에 있는 부대들이 오는 것과 상관없이, 이 전차부대가 해당 장소를 공격한다면 반란은 그냥 진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란군 측의 김진영 33 경비단 단장이 홀몸으로 나서 전차부대의 진격을 막았다. 전차부대를 이끄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김진영과 막역한 사이여서 설득이 통했던 것으로 보인다.김진영은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추후 육군참모총장까지 오른다. 다만 김영삼의 '하나회 대숙청' 때 가장 먼저 숙청됐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어처구니없는 행동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없다면 마땅히 그의 직속상관이자 국군의 최고 책임자인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전면에 나섰어야 했다. 사태 초기에 노재현이 나서서 전군에 반란 진압 명령을 내렸다면, 군 지휘 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반란군도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재현이 행방불명됨으로써 육군본부나 3군 사령부 등의 초동 대처에 큰 문제가 발생했고, 반란군은 추동력을 확보했다. 노재현은 패착이 되는 결정을 하기도 했다. 반란군 진압을 위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기사)과 26사단의 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전이 발생할 수 있으니 말로 해결하자는 게 이유였다. 또한 반란군이 국방부를 점령할 때, 노재현은 미적거리다 그곳에서 체포됨으로써 반란군의 최종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중앙청을 장악한 반란군.
■9 공수여단의 회군
전두환은 12.12 쿠데타를 시행하기에 앞서, 유사시 어느 부대보다 신속하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4개 공수여단 중 1,3,5 공수여단을 쿠데타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남은 9 공수여단은 포섭하지 못했던 만큼, 전두환은 쿠데타 당일 밤 이 부대의 출동을 우려하고 있었다. 9 공수여단의 화력과 규모는 매우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긴박한 상황 가운데 9 공수여단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서울로 긴급 출동했다. 이때 반란군 측의 1 공수여단도 서울로 출동하는 중이었다. 두 부대 중에 9 공수여단이 더 빨리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다. 9 공수여단이 먼저 서울로 진입해 반란군 핵심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공격하거나 육군본부 주변에 진을 쳤다면, 반란은 실패했을 것이다. 노태우는 9 공수여단 출동 소식을 듣고 자결까지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두환의 기만책에 속아 넘어간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어이없는 결정으로 9 공수여단은 회군했다. 육군본부는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를 스스로 거둬들였던 셈이다.
■B2 벙커 포기
육군본부의 B2 벙커는 북한의 침략 등에 대비해 만든 막강한 방어 요새였다. 즉 쉽게 무너질 만한 장소가 결코 아니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안내상이 연기한 한 반란군 인사가 "B2 벙커 뚫기가 얼마나 어려운데"라는 발언을 했다. 군사 반란 당시 육군본부 수뇌부는 B2 벙커에서 지휘를 했다. 하지만 반란군 측의 1 공수여단이 쳐들어올 때, 그들은 너무도 쉽게 B2 벙커를 포기했다. 비록 전투병력이 부족했지만, 마음만 먹었다면 육군본부 측이 B2 벙커에서 결사항전을 하며 시간을 끄는 게 가능했을 수 있다. 일단 B2 벙커에서 항전하면서 버티다 보면 아침은 밝아왔을 것이고, 그 사이 9 공수여단이나 수기사 등 진압군 병력이 도와주러 오거나 주한미군 및 국민들의 협조를 기대해 볼 수 있었다.
■뒤늦게 사태 파악한 존 위컴
존 위컴은 한미연합군사령관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평시작전통제권도 미군에게 있었다. 따라서 주요 군 병력을 출동시킬 때에는 위컴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전방부대인 노태우의 9사단 출동은 더욱 그랬다. 하지만 반란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위컴도 적시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군사 반란 소식을 접한 위컴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만약 위컴이 제때 상황 파악을 하고 대처를 했다면, 반란군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이 전면에 나섰다면
기실 최규하는 대통령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권력 의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최규하는 김종필을 만나 대통령직을 제안했다. 이때 김종필은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는 것보다 개헌을 한 후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종필이 최규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면, 군사 반란은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종필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전두환, 노태우보다 한참 위의 군 선배였고 공화당 총재로서 정치적 기반도 매우 탄탄했다. 한마디로 유약한 최규하와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여담으로 김종필은 전두환의 존재도 잘 몰랐다고 하며, 보안사로 연행됐을 때 정승화 김대중 등과 달리 고문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되레 이인자인 노태우가 찾아와 극진히 예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