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의 역사 1] 고려판 왕자의 난 전말
#. 아래 내용은 2024년 4월에 출간된 '암살의 역사' 서두 부분.
"혜종이 승하할 당시 궁궐의 모든 문이 봉쇄됐고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됐다고 한다. 보통 왕이 사망할 때 많은 신료들이 근거리에 위치해 왕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곤 한다. 즉 혜종의 사망 당시 풍경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상이한 모습이 연출됐다."
한 국가가 창업한 직후에는 필연적으로 혼란이 뒤따른다. 특히 창업자의 뒤를 이을 후계 권력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투가 벌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에 발생한 '제1,2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중심이 된 해당 사건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초기에도 이와 유사한 권력 쟁투가 있었다. 그런데 고려 시대 사건은 조선의 그것보다 복잡하고 의혹이 짙다. 권력 쟁투를 야기한 인물은 대호족인 '왕규'로 알려졌다. 그가 야욕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역사에 '왕규의 난'으로 기록된 권력 쟁투로 인해 신생국가 고려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왕건의 장자이자 고려 제2대 왕인 '혜종'과 주요 신료가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다. 역사는 해당 사건의 책임을 전부 왕규라는 인물에게 돌린다.
하지만 역사는 때론 '정사'로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정사 너머에 있는 영역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당시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왕규의 난은 납득이 안 되는 측면들이 많다. 반란을 일으킬 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에도 굳이 반란이라는 무리수를 뒀다고 한다. 이 같은 의구심은 다른 인물들에게 혐의점을 돌리게 한다. 바로 '왕요'와 '왕소'라는 인물들이다. 왕규와 달리 군사적 기반을 갖췄던 이들이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추정이 뒤따른다. 이른바 '고려판 왕자의 난'이다. 왕규의 난보다 설득력이 높은 왕자의 난으로 인해 고려는 초기부터 '골육상쟁'의 비극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미약한 군주였던 혜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과 고려 초기 권력쟁투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