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 혁명

[서기장들] 블라디미르 레닌 2

by 최경식
다운로드.jpeg 볼셰비키 혁명 당시, 대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 바로 뒤에 스탈린의 모습도 보인다. 이 그림은 스탈린을 교묘하게 레닌의 후계자로 묘사했다.

■고조되는 혁명의 열기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발달했다. 대규모 공장제 공업과 중공업 분야 등에서 이전 대비 눈에 띄는 발달상을 보였다. 그러면서 도시 노동자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해 수백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매우 적은 임금을 받으며 극한의 노동에 시달렸다. 복지 혜택은 조금도 누릴 수 없었고 작은 실수로도 무거운 징벌을 받았다. 약자인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존엄과 권리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노동자들끼리 연대해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만들었다. 척박한 노동 환경에 맞서는 만큼, 노동자들의 투쟁은 날이 갈수록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투쟁은 '파업'이다. 특히 1885년 러시아 주에보에서 일어난 섬유노동자 파업은 수만 명이 참가해 충격을 줬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에는 탄압을 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이 수그러들지 않자 이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자본가들(부르주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온갖 부정부패와 편법을 일삼으며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자연히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증오했다. 나아가 계층구조에서 가장 상층부에 존재하는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만도 하늘을 찔렀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선사하는 이념이 등장했다. 바로 '공산주의'다. 이는 사적 소유의 철폐와 생산 수단의 공유화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가해방을 실현, 마침내 국가와 더불어 지배와 피지배를 나누는 사회적 계급이 소멸된 사회를 추구했다.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가 체계화가 덜된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내세운 게 공산주의다. 사회주의의 큰 틀 안에 공산주의도 한 분파로써 존재한다. 레닌은 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구 지배세력을 축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회주의 시기라고 불렀다. 이 과도기를 넘어 최종적 단계인 공산주의가 도래한다고 주장했다.) 당초 러시아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노동자들에게까지 빠르게 확산됐다. 일순간 충실한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획기적이고 매력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들이 번역된 후 널리 보급됐으며 국내외에서 각종 공산주의 관련 조직이 생겨났다. '노동자 해방단', '토치키스 그룹' 등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기운이 싹틀 무렵, 니콜라이 2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자유주의자들과 대다수 국민들은 니콜라이 2세가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시행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길 소망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이 무색하게 새 황제는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3세처럼 전제군주제를 강화했다.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는 개혁 요구와 투쟁 열기를 철저히 외면하고 탄압했다. 이에 수많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때 공산주의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1895년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해 대대적으로 투쟁했다. 레닌도 율리 마르토프 등과 함께 주요 구성원으로 참가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1898년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비록 무력에 의한 강제해산과 레닌 등 주요 구성원들의 투옥이 뒤따랐지만, 노동자들의 투쟁 의식과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다. 레닌과 마르토프 등은 출소한 뒤 영국 런던으로 망명해 공산주의 신문인 '이스크라'를 창간했다. 이 시기 시베리아 감옥에서 탈출해 망명해 있던 트로츠키도 이스크라의 편집진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해산됐다가 다시 결집한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혁명노선을 둘러싸고 레닌과 마르토프 간 극심한 대립이 발생했다. 레닌은 오로지 노동자와 농민, 소수 직업혁명가에 의해 혁명이 추진돼야 하며, 무장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르토프는 무장봉기는 절대로 불가하며, 노동자와 농민만이 아닌 소 부르주아 등도 포함된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레닌은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와 상관없이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이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마르토프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가 발달한 후에 사회주의 체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레닌을 지지하는 파벌은 '볼셰비키'(다수파), 마르토프를 지지하는 파벌은 '멘셰비키'(소수파)로 나눠졌다. 두 파벌은 한동안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불편한 동거를 했다. 그러다가 레닌은 1912년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하고 볼셰비키당을 만들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연일 노동자들의 파업과 민중 시위가 격화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하르코프 등 수많은 도시들에서 "전제정 타도"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남러시아 노동자 총파업에는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 시기에 발발한 '러일 전쟁'에 따른 민생 악화는 투쟁의 불에 기름을 부었다. 러시아 정부는 유화책은커녕 탄압의 고삐를 강하게 죌 뿐이었다. 이로 인해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로마노프 왕조를 아예 부정하고 황제 퇴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상황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유화책을 주장하는 측근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두마(국회) 설립, 헌법 제정, 각종 자유 및 인권 보장 등이 담겼다. 뒤이어 러시아는 전제군주가 두마와 국가평의회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다만 황제가 두마 해산권 등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보유했다.) 한동안 표트르 스톨리핀이라는 유능한 총리가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안정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 이후 괴승인 '라스푸틴'이 등장해 국정농단을 일삼았고, '제1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다시 대혼돈의 늪에 빠졌다.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은 갈수록 심각해져 황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러시아군은 전쟁에서 독일군에 연전연패했다. 더욱이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물가 상승 등 민생 파탄이 초래됐다.


사회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진행됐는데, 노동자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경우도 있었다. 이를 진압해야 할 군대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17년 초,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결정적으로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르크의 방직공업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것을 기점으로,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총파업이 발생했다. 진압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모두 돌아서 버렸다. 이른바 '2월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이후 공장과 군대 등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러시아 전역에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도 만들어졌다.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 병사의 대표자로 구성된 평의회를 의미한다.) 해당 소비에트는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8시간 노동제, 행정조직 구성 등을 시행했다. 대세가 기운 것을 확인한 두마 임시위원회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니콜라이 2세에게 재위를 양위한 후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니콜라이 2세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아닌 친동생에게 양위하려 했지만 친동생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양위를 하지 못한 채 폐위됐고, 300년 넘게 존속한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볼셰비키 혁명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협정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온건 좌파와 자본가, 지주 등 보수파들이 함께 한 일종의 연립정부였다. 러시아 국민들은 전제정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삶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민생은 안 좋았으며 소모적인 전쟁도 지속됐다. 특히 임시정부는 전후 세계질서 재편 등을 고려해 전쟁을 끝까지 하려 했다. 임시정부는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고, 민생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도 부족했다. 국민들은 서서히 임시정부에 등을 돌렸다. 노동자들도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정치 기구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런 시기에 두각을 나타낸 것이 레닌과 볼셰비키였다. 이들은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한 후 본격적인 혁명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레닌은 볼셰비키 집회에서 그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제국주의 전쟁 종결과 평화조약 체결, 임시정부 반대,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의 권력 장악, (볼셰비키가 다수인) 소비에트의 권력 확대 및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지주의 토지 국유화, 생산과 분배 통제 등이었다. 4월 테제는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임시정부와 부르주아,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등은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볼셰비키 일각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에도 레닌은 꿋꿋이 밀고 나가 볼셰비키 협의회가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하도록 했다. 아울러 러시아 국민들의 공감과 지지도 얻으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7월이 되자 임시정부는 독일군을 겨냥해 대대적인 하계공세를 감행했다. 야심 차게 추진한 하계공세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를 강하게 규탄했고 민심 이반은 더욱 극심해졌다. 급기야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 연대의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이 연대는 볼셰비키와 뜻을 같이 한다고 외치며 다른 부대와 노동자들에게도 무장봉기를 선동했다. 다만 볼셰비키는 현실적으로 권력 획득을 위한 무장봉기가 이르다고 판단, 자제를 촉구했다. 하지만 연대가 계속 무장봉기를 고집하자 볼셰비키는 마지못해 타브리다 궁으로 나아간 뒤 요구 사항들을 전달하자고 했다. 예상대로 임시정부는 이들의 전쟁 중단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 무장시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다른 부대에 연대의 시위를 진압하라고 명했다. 인기 없는 임시정부를 위해 나서는 부대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에 합류하는 인원이 점점 늘어나 수십만 명에 육박했다.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지만, 볼셰비키는 과감하게 나서지 못했다. 아직 민심이 확고하게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고 판단한 볼셰비키는 훗날을 도모하자며 시위대를 설득, 해산시켰다. 이틈을 타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를 탄압했다. 레닌과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그리고 볼셰비키 내에서 입지를 넓혀가던 트로츠키 등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피신했고 당 기관지 '프라우다' 발행은 금지됐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기회가 왔을 때 적극 행동할 것을 다짐했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다. 이를 증명하듯 당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7월 시위 이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임시정부의 새로운 수상이 됐다. 각료들은 서유럽 문화를 동경하며 모방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계속 통제했다.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실기하지 않고 과감하게 나설 계획이었다. 이런 와중에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일어나 임시정부는 또 한 번 민심을 잃었다. 러시아 장군이었던 코르닐로프는 임시정부를 전복한 뒤 러시아를 과거로 회귀시키려 했다. 독자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케렌스키는 볼셰비키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정도였다. 이 반란은 천운이 따라줘 의외로 쉽게 진압됐지만, 국민들은 임시정부의 무능과 위태로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욱이 민생이 악화될 대로 악화돼 국민들의 마음은 임시정부를 완전히 떠났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간 임시정부에 협조적이었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도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전장에서의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함에 따라 임시정부의 군부 지배력도 급속히 약화됐다. 볼셰비키가 노리는 무장봉기, 폭력혁명의 때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레닌은 임시정부가 부르주아들이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를 출범시킬 즈음에 폭력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으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다. 이때 레닌 이외에 적위대를 동원한 폭력혁명을 강하게 주장하고 주도한 사람이 트로츠키였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반대했고, 스탈린은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레닌의 의중을 파악한 뒤 급히 돌아섰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폭력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과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천명했다.


10월 24일, 레닌과 트로츠키의 공격 명령이 하달되자 모든 적위대가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페트로그라드 중심부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그런 다음 중앙전신국, 전화국, 역 등 주요 기관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아울러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조직된 군사혁명위원회의 요청으로 발트해 함대가 네바강 하구를 점령했다. 하루도 안돼 임시정부의 심장부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모든 반혁명 세력 거점이 무너졌다. 몇 시간 뒤 겨울궁전마저도 적위대의 손에 떨어지면서,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됐다. 볼셰비키가 생각보다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임시정부를 방어하는 병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500명도 안 되는 여군 대대가 전부였다. 이마저도 적위대가 돌격하자 바로 항복했다. 이미 민심을 크게 잃고 붕괴 조짐이 보였던 임시정부에 충성할 병력은 극히 드물었다. 혁명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스몰니 학원'에서 개최된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전쟁 종결을 위한 강화조약 체결과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도 약속됐다. 뒤이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가 창설됐다. 레닌이 인민위원장,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을 각각 맡았다. 인민위원회는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등 다른 좌파정당은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사회혁명당이 제1당으로 존재했던 두마를 해산시켰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지었다. 인민위원회 산하에 '최고인민경제회의'를 만들어 공산주의적 경제 개조에 착수했으며, 지주의 토지 몰수, 신분 호칭의 완전 폐지, 8시간 노동제 확립, 노동조건 개선, 교육 및 의료서비스 무료 제공 등을 시행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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