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서기장들] 블라디미르 레닌 3

by 최경식
러시아 내전. 볼셰비키의 '적군'과 왕당파와 자유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백군'이 격렬한 내전을 치렀다. 이 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함으로써 볼셰비키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러시아 내전

혁명으로 인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지만, 러시아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시행하는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왕당파(옛 귀족과 군인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 내 다른 파벌, 지방 민족 세력 등 반 볼셰비키 세력이 '백군'을 형성해 대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전은 1918년부터 본격화했다. 시베리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 타도"를 외치며 진격했다. 남부 지역에서는 코사크 군이 진격했다. 외세까지 개입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볼셰비키 확산을 막기 위해 백군을 지원하며 참전했다. 다만 외국군은 전쟁 의지가 높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내전 초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백군이었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외세의 군사 지원과 적군의 실책에 힘입어 볼셰비키 수도인 모스크바로 맹렬히 진격했다. 한 때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60km 앞까지 백군이 진격함에 따라 모스크바 함락이 눈 앞에 다가온 듯 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레닌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각지에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고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노동 통제를 강화했다. 이른바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정책은 농민과 노동자의 반발을 불렀지만, 전쟁 수행에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아울러 적군은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여기에는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됐다. 소련의 첫 정보기관인 '체카'도 반혁명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볼셰비키와 적군 입장에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기 때문에 공포정치의 방식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적군은 초기의 열세를 딛고, 전황을 점차 유리하게 이끌었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등 핵심적인 중앙 지역을 사수 및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철도망까지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군대 이동과 보급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특히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이자 국방장관까지 겸임한 트로츠키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그는 징병제를 도입함과 더불어 적군을 체계를 갖춘 '붉은 군대'로 개편했다. 뒤이어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에게 '군사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붙인 후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대거 편입시켰다.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의심되는 장교들을 감시하기 위해 '정치장교' 제도를 도입하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붉은 군대의 전력은 크게 향상됐다. (다만 트로츠키는 군대를 운용하는 수단으로써 '공포'와 '폭력'을 적극 도입해 비판을 받았다. 탈주병이나 의심스러운 장교 등을 적절한 재판 없이 즉결처형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붉은 군대의 잔혹한 전통은 스탈린이 아닌 트로츠키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백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적군에게 군사적으로 밀린 것은 물론 내부 분열로 자중지란에 빠졌다. 백군 내에서 세력을 형성한 이들은 저마다 미래 구상이 달랐다. 어떤 이들은 왕정을 세우고 싶어했고, 또 다른 이들은 공화정을 세우고 싶어했다. 백군의 여러가지 부정적 조건들로 인해 러시아 내전의 무게추는 볼셰비키와 적군 쪽으로 빠르게 쏠렸다. 믿었던 외세의 지원마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결국 백군은 완전히 붕괴됐다. 마지막 저항이 사라지자 볼셰비키 일당 독재가 확립됐다. 나아가 1922년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레닌은 이 신생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됐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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