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상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에 함양의 가을은 산과 들, 강마다 짙고 붉은색들이 지천에 늘렸다. 1박 2일 함양의 숲과 화림동계곡에서 선비문화의 정수인 정자를 품고 왔다. 퇴근하고 여름 계곡과 가을 단풍이 절경인 용추자연휴양림 숲 속의 집에서 1박을 했다. 어느새 숲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밤은 깊었고 잠잠했다. 풀벌레와 계곡에서 내려오는 청량한 물소리만이 아련하게 들려온다. 불빛에 의지해 글의 언어와 마주했고 잠을 청했다.
휴양림의 아침은 평온했고 공기는 찼다. 믹스커피 한 잔에 맑은 공기와 자연의 숨결이 마음을 정화하기에 충분하다. 아직 깊은 가을은 아니지만 들려오는 자연의 잔잔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호수 위에 떠 있는 고요처럼 물결치는 듯하다. 특히 숲에서 맞이하는 아침에 산책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숲 속의 집에서 임도를 따라가면 월봉사와 2.5㎞에서 만나는 수망령, 함양과 거창의 경계에 달한다. 깊은 골짜기에는 편백나무 아래 곱게 떨어진 낙엽도 보고 구절초도 만나고 땅에 떨어진 밤과 도토리, 다람쥐도 만났다. 들어갈수록 울창해진 숲의 향은 더 진해졌다.
아침에 땀을 흘리고 먹는 소소한 조식은 꿀맛이었다. 가을을 처음 그렇게 마주하는 나는 햇살에 비친 나무의 결 따라 오감을 느낀다. 바쁜 삶 속에 숲에서 느긋함을 배웠다.
함양 하면 ‘정자 문화의 1번지’이다. 지리산 언저리 화림동계곡은 산도 물도 바위도 소(沼)도 그 자체가 자연이 빚은 예술로 그 자락에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학문과 풍류를 즐긴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걷고 싶고 잠시 쉬고 싶은 길은 옛 선비가 걷는 그 길과 마주했다는 것에 설렜다.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까지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형형색색의 무르익어 가는 가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나는 농월정에서 출발하여 거연정까지 각각의 정자가 지닌 옛이야기 속으로 한량처럼 즐겨봤다.
정자의 시발점은 농월정이다. 넓은 너럭바위에 걸터앉은 정자는 ‘농월’(弄月)은 ‘달을 즐기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억겁의 오랜 세월만큼이나 깎이고 다듬어진 정교한 너럭바위의 골과 홈이 멋스럽다. 자연이 빚은 반석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은 옥같이 고웠다. 농월정에서 맞은편의 산책로도 가볼 만하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업고 강을 건넜다는 동호 장만리 선생이 낙향해 머물렀던 곳이다. 통나무를 도끼질한 듯 투박한 계단이 다른 정자와 색다르다. 동호정 앞에 거대한 너럭바위는 해를 가릴 정도로 넓다하여 차일암이라 불렀다. 차일암에는 연일 등산객과 방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소나무 군락지와 징검다리가 있어 사뭇 걷는 재미가 있다.
군자정과 거연정으로 가는 길은 동호정으로 이어지는 선비문화탐방로인 숲길이 좋다. 숲에서 마주하는 계곡의 맑게 흐르는 소리와 옷깃에 스치는 나무의 결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을 기리기 위한 정자로 아담하고 소박한 자태가 매력적이다. 지척에 있는 거연정은 그야말로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그림 같은 운치가 빼어났다. 사계절 다르게 느낄 정도로 황홀함이 절로 들 정도다.
정자에서 바라본 남강천 따라 빚은 계곡과 너럭바위, 자연의 풍광은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진다. 시 한 수 읊은 선비의 풍류가 새삼 부러워지는 한 때다. 한참 동안 누마루에 앉아 옛 선비와 조우하고 나면 가을은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이맘때쯤이면 함양의 그윽한 단풍이 화림동계곡에 곱디곱게 물들어 호사를 누릴 시간이겠다. 절로 시가 흘러나오는 화림동계곡의 정자를 찾아 풍류의 백미에 빠져보기를 추천한다.
* 이 글은 경남일보 10.26일자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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