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창문을 열었더니 찬 공기가 들어왔다. 몸을 움츠리게 했다. 텃밭에는 배추와 콩, 고추가 영글게 익어간다. 나무도 가을색으로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계절은 본래 소리 없이 찾아온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현기증 나는 더위에 자제력을 잃고 살인을 저질렀다.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라고 써 있다. 소설 주인공 뫼르소처럼 느겼던 '살인적인 더위'는 우리의 삶을 더없이 불편하게 했다.
누구나 희망했을 가을이 왔지만 왠지 허전함이 남는다. 그럼에도 가을이 왔으니 내 마음도 분주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집청소를 한다.
여름을 시원하게 해준 선풍기는 또 기약 없이 창고에 들어가고 에어컨은 커버를 씌우고 여름이불은 이불장에 넣는다. 땀으로 젖은 여름옷은 세탁을 한다. 말린 옷들은 옷장에 들어가고 가을옷으로 배치했다. 침대보와 이불을 바꾸고 커튼도 갈았다.
계절을 느낀다는 것이 평소에 알 수 없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각으로 계절의 흐름을 담아낸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 여름의 끝은 아쉬움으로 남고 새로운 계절은 계절마다 느끼는 것들이 달라 익숙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구나 희망했을 가을이 왔지만 왠지 허전함이 남는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꺼내 읽기 바라는 마음이 가을에는 더 간절하다. 가을은 가을스러운 에세이 위주로 읽어봐야겠다. 에세이에서 품은 부드럽고 애잔한 삶의 결은 가을과 닮아서 읽는 내내 밑줄을 긋고 좋은 문장은 필사할 수 있으니 좋을 것 같다.
라디오에 들려오는 노래도 가을을 탄다. 가을이라는 주제곡이 흘러나오면 흥얼거리기도 하고 취할 때도 있다. 특히 가을의 노래가사들이 더 애잔하다. 추억으로 소환할 듯 스쳐가는 풍경들이 그저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서글픔일까.
가을은 등산하기 좋은 계절이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특히 가을산은 열매와 꽃, 빛깔과 향기를 진하게 내뿜어 준다. 계절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인 산은 외롭지 않다. 산이 품은 기운들이 오르는 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모과를 좋아하는 나는 길 위에 열린 모과를 눈여겨보았다. 올여름날씨 때문인지 열매가 없었다. 있어도 벌레가 먹어 흉터가 많았다. 다른 곳에도 마찬가지다. 들녘에 넘실대는 황금빛 벼들이 알차다. 눈으로 보아도 배불렀고 따뜻함이 풍긴다. 계절이라는 것이 변한다고 하지만 결국 변화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이미지뿐이다.
여름에 먹던 냉면과 밀면, 냉국수는 이제 가을이 되면서 따뜻한 국물이 들어간 추어탕과 돼지국밥이 떠오른다. 계절마다 생각나는 것들은 우리 몸의 감각처럼 익숙하게 만든다. 익숙하다는 것은 우리 몸에 편하고 자연스럽게 닿기 때문이다. 여름의 맛과 가을의 맛은 다르다. 맛도 생각의 느낌도 다르다. 그 뜨거웠던 여름은 견딘 백일홍을 보면 여름을 생각하고 가을을 떠올린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었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 이성복 시 중)
이성복의 시 '그 여름의 끝'에서 여름의 폭풍을 견뎌낸 백일홍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라.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말처럼 사랑의 낙원에 다가서는 일은 심장을 꽃처럼 붉게 만드는 여전한 '끝'의 '시작'은 분명히 잠재돼 있다고 했다.
여름은 그렇게 백일홍처럼 억세게 딛고 이겨냈고 가을이라는 부드러운 꽃들이 길가에 피었다. 코스모스와 들국화, 구절초 등 가는 길마다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계절이 바뀔 대마다 우리는 새 옷을 입고 내일을 준비한다.
일상이 변화하는 것은 우리가 조금씩 나아가는 꿈을 엮는다는 것이다. 이 작은 가르침으로 우리는 여름을 견디고 가을을 맞이하는 새로운 마음을 배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10.7일자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