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은 선명하다.
산길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고 앙상한 나무 사이로 스치는 소리와 새소리는 눈에서 귀로 또렷하게 옮겨붙는다. 불필요한 것이 사라진 계절이라서일까. 겨울의 풍경은 망설임 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그 맑음은 오래도록 시야에 남는다. 겨울밤의 독서 또한 겨울 산처럼 또렷함이 매우 닮았다.
고요 속에서 읽는 속도는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문장은 텍스트 위에 머무르지 않고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 문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감각에 가깝다. 그렇게 읽은 책은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감각과 시각, 청각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낸 기억은 화려한 자극보다 단단하게 삶의 깊은 시간으로 스며든다.
우리가 읽고자 하는 책은 선천적인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후천적인 반복 속에서 읽는 시간이 몸에 익어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문장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의미보다 감각으로 먼저 스며드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신체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재미있고 긴장이 살아 있는 책은 밤을 잊게 만든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른 채 날이 밝아오고 책을 덮은 뒤에도 읽었던 문장이 나와 겹쳐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끝난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시간은 확실히 깊이가 다르다. 소설은 그렇게 나를 또 다른 삶과 마주하게 했다.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여러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며 언젠가 스쳐 갈 얼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미순의 장편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속 명주와 준성, 진천 할아버지와 은진의 얼굴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도 그들이 허구의 인물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삶처럼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삶이란 결국 돌고 돌아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일지도 모른다.
겨울에 책이 잘 읽히고 글이 잘 써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글의 따뜻한 온기가 이불 속의 온기처럼 감정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 온기는 더 또렷해지고 오래된 기억과 햇살을 불러온다. 마음 한구석에서 잊고 있던 장면들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겨울밤의 독서와 글쓰기는 유난히도 특별하다.
법정 스님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씌어진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씌어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좋은 문장은 숨을 고르지 않아도 애쓰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독자는 두려움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신비가 겨울의 독서가 가진 맛이다. 바쁜 시간을 잠시 멈추고 그 감각을 붙잡는 새벽은 아침을 맞이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겨울이 지나도 우리는 안다.
그 밤에 읽힌 문장 하나가 오래도록 삶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겨울에 읽은 책은 차분한 일상을 준비하게 하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삶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임을. 겨울밤에 읽은 책은 그만큼 온기가 남아있다. 그 온기는 오래도록 가슴을 따뜻하게 데운다. 겨울밤은 고요가 읽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