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 결정
설계 계약 후 첫 설계 미팅 날. 일요일 오후 건축가인 K소장님이 우리 집으로 오셨다. 남편은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소장님 댁과 우리 집이 멀지 않아 사무실이 아닌 우리 집에서 미팅을 하게 된 것이다. K소장님에게 집을 짓는 건축주들 중 어린 자녀를 둔 젊은 가족이 많아서인지 사무실에서 미팅이 힘든 경우 소장님이 직접 건축주의 집으로 찾아가 설계 미팅을 하는 경우가 많은 듯했다.
설계 과정의 첫 단계는 집을 어떤 형태의 덩어리로 할 건지 정하는 거였다. 예전에 상담을 신청하면서 메일로 보냈던 우리 가족 소개와 원하는 집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의 매스를 가져오셨다. 스티로폼으로 만든 작은 매스 모형들을 보면서 각 매스의 장단점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매스가 결정되면 평면작업에 들어간다고 했다. 5가지 매스 중 한 가지를 결정해 2~3일 내에 알려 달라고 하셨다. 소장님은 우리 가족에게 맞는 선택을 하라며 1시간도 안 되는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첫 미팅을 마치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매스를 결정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섯 가지 중 1안과 5안 두 개가 우리 가족의 마음에 들었다. 1안은 1층에 당구장과 LDK(Living Dining Kichen) 공간이 하나의 네모난 공간에 다 들어가는 거였다. 1층이 탁 트여 넓어 보이고, 당구장과 LDK사이의 공간을 우리가 원하는 악기 연습공간 등으로 활용 가능해 가변적으로 쓸 수 있어 공간 활용성이 높았다. 2층도 공간이 넉넉했고 공간들이 한 덩어리로 모여있으니 벽체가 많지 않아 건축비도 절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점은 공간 구분이 약해 서로 간에 방해받을 수 있다는 거였고, 당구대가 너무 집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5안은 당구장이 1안과 비슷하지만 ㄱ자 형태로 당구장이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되어있는 안이었다. 1안 보다 독립성이 보장되어 안정적이고 소음 차단에 좀 더 유리했다. 당구대가 가려져서 보통 집 같아 보이는 것도 좋았다. 단점은 건축비가 좀 더 많이 들 것 같다는 정도. 당구장은 별도로 하되 생활공간과 긴밀히 이어지게 하는 5안으로 가족의 의견이 모아졌다.
나머지 매스는 당구장을 별채로 두고 복도를 지나서 가는 안과 중정형 단층집 안이었는데 가족 모두 별로라고 생각했다. 복도로 버려지는 공간이 많고 집 자체가 길어지는 게 동선 낭비 같았다. 공간 활용성이 떨어질 것 같았고 건축비 상승도 우려되었다. 그래서 당구장과 생활공간이 어느 정도 거리가 보장되지만 별채처럼 너무 떨어져 있지도 않은 5안이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을 지어 들어와 살아보니 그때의 우리 결정은 아파트 평면을 벗어나는 못하는 발상이었지 않나 싶다. 아파트 평면에 익숙해져 있어 별채나 중정형은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두 번째 집을 짓는다면 중정형 단층집으로 할 것이다. 복도가 길다는 것은 집에서 쓸데없이 동선이 길어지는 게 아니라 걸어 다닐 수 있는 동선 생기는 것이고 이것은 불편함보다 공간적인 여유를 줌과 동시에 마음에 여유를 준다는 걸 알았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나 밖에 나가기 귀찮을 때 집안에서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데, 우리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당구장에서 당구대 주변을 걸으며 깨달은 점이다. 버려지는 공간에 대해 예민했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그 복도 공간이 여유를 선물하는 굉장히 유용한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정형으로 지었을 때 또 다른 장점은 마당이 외부 시선에서 자유로워 활용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밀집된 주택가에서 시선 차단된 마당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모른다. 집을 지어 살기 전에는 2층 집에 대한 로망이 있어 단층집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단층집으로 지어 계단 없이 살면 무릎도 안 아프지 얼마나 편할지. 그 당시에는 다양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적고 두려움도 커서 과감한 시도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