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이 거의 결정이 되고 3D로 구현된 우리 집을 스케치업 프로그램으로 신나게 돌아다녀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확신이 안 들었다. 그 이유는 첫 미팅 때부터 바쁘게 진행되는 절차에 따라가느라 왜 집을 짓고자 했는지, 가족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건축가에게 깊은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계 미팅을 시작하기 전에는 기대를 가득 안고 있었다. 건축가와 마주 앉아 왜 집을 지으려고 하는지부터 시작해 가족과 집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건축가는 묻지도 듣지도 않은 채, 첫 미팅에 결과물부터 만들어 왔다. 상담 약속을 잡을 때 내가 메일로 보냈던 원하는 집과 가족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바탕으로 말이다. 그 메일에는 우리가 원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간략하게 들어가 있긴 했지만, 나는 건축가에게 우리 가족에 대해 더 자세히 소개하며, 원하는 집에 대해 깊이 있고 충분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원했다. 그러나 첫 미팅 때 건축가는 매스를 만들어와 설명한 뒤 가족이 의논하여 선택하라며 미팅 시간을 마무리했다. 원하는 집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초보 건축주인 나는 '원래 이런 건가, 속 깊은 얘기는 언제 하는 거지?'의아해하며 후루룩 진행되는 절차를 일단 어리바리하게 따라갔다. 이 사무소만의 특별한 진행 방식이 있나 싶어 다음 미팅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 미팅 때는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면서.
매 미팅 때마다 소장님은 다수의 주택 설계 경험을 토대로 설계 절차를 체계적이고 신속하게 진행시켰다. 나는 소장님과 도면을 보며 그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정해나갔으면 했지만 미팅 시간마다 엉덩이를 들썩이시며 ‘할 말 다했으니 바빠서 이만’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소장님을 붙들고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기가 어려웠다. 미팅 때는 소장님이 오셔서 도면에 대해 설명을 하셨지만 실제로 작업은 우리 집 담당 과장님과 대리님 두 분이 맡아하셨다. 이럴 바엔 소장님이 아니라 실제 작업을 하시는 두 분과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몇 번의 미팅 끝에 후루룩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설계도를 앞에 두고 의문이 들었다. '집에 대해 제대로 털어놓을 기회도 없이 완성된 이 도면에 우리의 바람과 취향이 충분히 깃들어 있나? 이 집이 과연 오랜 시간 꿈꿔온 우리 집인가?' 기능과 비용에 집중된 보편적인 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도면이 확정되기 전 어떻게든, 간직해왔던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미팅 시간에 기회가 안 주어지니 글로 써서 건축가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하나하나 글로 풀기 시작했다. 그동안 모아 온 사진도 첨부해 가면서, 솔직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게 내 마음을 표현했다. 건축가가 과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줄지 염려가 되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건축가가 건축주인 우리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느껴졌고, 사무실에 일이 많이 없는 시기라고 해서 계약했건만 여전히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느라고 바빠 보였다. 그런 분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가 무시라도 당할 것 같아 거절감이 싫어서 대충대충 여기까지 이끌려 왔다. 갑질하지 않으려고, 건축가를 존중하는 좋은 건축주가 되고 싶어서인 이유도 있었다. 건축가가 이끄는 대로 착실하게 따라가면 좋은 건축주로 보일까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놓는 시간을 갖지 못하니 답답함이 한계치에 왔고, 이제 정말 안 되겠다 싶었다. 기대한 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건축가를 원망하고 후회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하고자 했고 그 방법이 글과 사진으로 충분히 풀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