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을 짓게 되었는지, 어떤 집을 짓기 원하는지, 나와 가족은 어떤 사람인지 하고 싶은 말을 줄줄이 다 써서 건축가와 그 팀에게 보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어렵게 속내를 꺼내 보인 건데, 그 글을 본 K소장님의 첫마디는 "기네요."였다. 너무 내용이 길다는 거였다. 건축가는 뒤이어 잘 읽어보고 설계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이미 내 마음은 상해버렸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았지만 소통의 시작이 되기는커녕 그저 갑질한 건축주가 되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두 달 여간의 시간 동안 건축가는 한결같이 거리를 유지했고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건축가는 언어적 소통에 능하지도 않았고 즐기지도 않았다. 건축가가 미팅 때마다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왔던 것은 건축주의 생활을 직접 보면서 건축주를 이해하려고 했던 그 나름의 소통방식일 수 있다. 그런 분에게 대화 좀 하자며 내 마음을 열어 보여준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건축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설계가 착착 진행되어 평면이 거의 완성된 시점에, 뒤늦게 우르르할 말을 쏟아 놓은 건축주라니 많이 당황스웠겠다.
나는 집에 대해 충분히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다. 설계를 해나가며 너무 많은 선택지에 부담이 되어 함께 이야기하면서 좁혀나가고 싶었다. 남편에게 집에 대해 이야기할라 치면 피곤하다거나 너 맘대로 하라거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회피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집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주어, 아들과 집에 대해 열띤 토의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정리한 결과를 남편과 짧게 나누었다. 남편역시 건축가처럼 언어적인 소통을 즐기지도 능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나는 왜 자꾸 파트너로 이런 사람들을 고르고 소통이 안 된다고 괴로워하는 거야~!!!!' 자괴감이 들었다. 남편과 건축가 모두 언어적인 소통보다는, 쌓아온 경험과 실력으로 착착 자기 일을 잘해나가는 사람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도면 위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가길 원했던 내 바람은 집에서도 설계미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거다. 집에 대한 내 열정이 지나쳤던 걸까? 나는 집을 짓는 내내 나만큼 집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남편과 건축가에게 상처받았고 원망하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