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소비자가 아닌 콘텐츠 생산자 되기
일 때문에 많은 글을 쓰지만, '돈 받고 쓰는 글'이 아닌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브런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니 '돈 안 되는 일에 왜 많은 시간을 쓰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돈은 안 되지만 그래도 꾸준히 글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이유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 답을 찾게 됐다. 바로 콘텐츠 소비자가 아닌, '콘텐츠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것.
난 직업적인 이유로 '레퍼런스 써칭', '트렌드 습득'등의 명분으로 각종 SNS 채널과 언론 매체 글들을 찾아 읽는다. 콘텐츠 피로도가 생기기도 하고,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지만 '업무적인 모니터링'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딴짓과 업무, 그 애매한 경계에서 콘텐츠를 볼 때면 이건 과연 소모적인 콘텐츠 소비인지 아니면 업무의 연장선인지 헷갈렸다.
'돈은 안되지만 왜 꾸준히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해결된 계기는 <최소한의 소비>라는 브런치북을 보고 나서다.
한 초등교사가 육아휴직 중 연재한 글인데, 100% 공감할 순 없지만 내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많은 부분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정리한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작가는 '남들처럼 살려면' 하루 종일 일해서 돈과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시간을 얻는 대신 돈을 적게 쓰자 생각하고 휴직했다.
소비가 미덕인 세상에 '절약'을 자랑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우아한 절약'이라고 이름 붙인 후, 뜻이 맞는 지인들과 책방에 모여 이번 주엔 얼마나 절약했는지 서로 공유하는 절약 모임을 하기도 하고, 돈 안 쓰는 걸 '자랑'하는 글을 연재한다.
네 식구의 하루 식비는 1만 5천 원으로 해결하고, 돈을 적게 쓰기 위해서는 일단 키즈카페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이면 입장료가 없는 공원, 미술관, 강변 등에 도시락을 싸서 나간다. 작가는 필수품과 사치품을 구분한 후 필수품만 사는데, 세탁건조기와 식기세척기는 필수품이 아니라 생각해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청소기도 사용하지 않고 빗자루를 사용한다.
내가 인상 깊었던 건 그저 절약에서 그치지 않고, 절약의 결과가 풍요로운 인생을 가져온다는 점이었다.
취미생활이든, 누군가와의 만남이든 돈을 써야 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절약을 하다 보니 충만한 자유로움과 사유와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됐다는 것. 그리고 광고로 점철된 사회에서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닌 '생산자'가 되는 삶을 지향한다고 한다.
돈가스를 사 먹는 사람이 아닌, 돈가스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육아휴직 중 남편의 벌이만으로 살아야 하니 최대한 소비를 줄이고 있다고 하며, 돈가스가 먹고 싶은 날은 정육점에서 등심을 사 와 밀가루와 계란, 그리고 빵가루를 입혀 직접 돈가스를 튀겨 먹는다. 물론 재료를 사야 하긴 하지만 '돈가스 소비자'가 아닌 '돈가스 생산자'가 된 셈이다.
외식 대신 집밥, 키즈카페 대신 나들이, 비용이 들어가는 취미활동 대신 돈이 들지 않는 취미활동 지향 등 일련의 경험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됐다고 한다. ‘돈을 쓰지 않은 만큼 저금을 할 수 있어서 좋다’라기보다는 '적은 돈으로도 불편함 없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말하는 작가가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사유의 삶'을 살게 됐다는 점.
절약하는 일상이 ‘궁상’이 아닌 ‘콘텐츠’가 되고, 그 과정에서 깊은 사색과 사유를 통해 단단한 삶의 기초가 구축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얼마 전까지 고민했던 부분, '의뢰받고 쓰는 글이 지겨워서 내 이야기를 쓰지만, 왜 돈이 안 되는 내 이야기를 꾸준히 써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콘텐츠 생산자'로 살고 싶어서 인 거 같다. 내 생각을 머릿속에만 두면 휘발되기도 하고 정리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정도 정제되기도 하고, 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할 때가 많다. 거창하지만 글쓰기를 하다 보면 '사유'하게 되는 셈이다.
기업에 의뢰받아서 쓰는 글들도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이긴 하지만, 메시지를 발신하는 주체는 내가 아닌 기업이다. 따라서 나는 기업에서 원하는 가이드라인에 맞춰 적당한 직업의식을 가미해 글을 쓸 뿐이다. 온전한 내 이야기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다.
<최소한의 소비> 작가가 절약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더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듯, 나도 내가 흘려보내는 일상의 생각들을 정리하며 콘텐츠(글)로 남기다 보면 생산자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기업에서 의뢰받은 글들이 싫은 건 아니다. 취미와 일이 선순환을 이루는 게 내가 지향하는 삶이다. 취미로 쓰는 글들을 지속하다 보면 문장이나 표현이 좋아질 거고, 그러다 보면 의뢰받은 글에도 더 힘이 실릴 거다.
반대로, 기업에서 주는 피드백을 반영해 수정하다 보면 내 글의 구멍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런 과정에서 체득한 게 내 개인적인 글에도 반영될 테니 그 또한 선순환이다. 심지어 원고료도 받으니 일석이조다.
콘텐츠 생산자로서 꾸준히 글을 쓰며, 의뢰받은 글과 내 이야기 사이에 선순환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사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너무 주관적이고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 또한 남의 기준과 나의 기준에 차이가 있다. 이 부분에 고민하던 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체적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책이 있다.
엄지혜 작가의 <태도의 말들>에서 시인 서한영교의 인터뷰 기사를 발췌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와 함께 시인의 감성과 시민의 감각을 지니고 시시한 일상을 잘 가꾸며 사는 사람으로 커 나가고 싶다. 무엇보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욕심보다 요리나 청소 같은 삶의 작은 단위를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수희 작가의 <온전히 나답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하찮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이 된다는 것. 하찮아 보여도 그게 인생이라는 것. 그 하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것.
나이가 들면 사는 게 복잡하고 또 팍팍하긴 해도, 그때처럼 힘들지는 않다. 왜냐하면 매 순간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된 것만 해도 사는 게 훨씬 편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기준, 혹은 세상의 기준에 성공이나 행복을 재단하지 않고,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 삶의 주체라는 건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반찬은 반찬가게에서, 집 청소는 청소 도우미에게 외주화 하는 삶이 어찌 보면 효율적이고, 시간이 돈인 세상에 시간을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집에 생긴 먼지를 직접 닦고, 우리 가족 먹은 밥상을 직접 차리고 치우는 사소한 일들이 모여 내 삶이 완성된다 생각하니, 그런 작은 일들을 직접 해결하는 것이 주체적인 삶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만 원 아끼기 위해 고민하느니, 그 시간에 2만 원을 버는 삶이 효율적이라 생각해왔다. 집안일할 시간에 차라리 일을 하면 '집안일을 외주화 하며 드는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버니 효율적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하며(돈을 번다는 건 기본적으로 남을 위해 하는 일이 많으니)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내 삶을 외주화 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현실적으로 모든 걸 스스로 할 순 없으니, ‘주체적인 삶을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과 ‘효율적인 외주화’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
이 '적당한 균형'을 잘 잡아가고 싶다. 다만 균형이 기울어진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또한 내가 바라는 모습이다.
물 흐르는 대로 일상에 충실하되, 그 일상이 지루하거나 푸념으로 가득 차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별할 거 없는 하루에도 깊이 사유하며 새로운 걸 발견하고, 기록하는 콘텐츠 생산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