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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Mar 16. 2020

미스터트롯과 코로나19

3대가 함께 즐기는 트로트

코로나로 유치원 개학 연기가 되면서 아이와 함께 부모님 집에 와있다. 동네에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 바이러스를 피해 왔는데, 잠잠해지지않아 장기화됐다.


아이 낳고 5개월째에 회사 복직하면서 복직 첫 달 부모님 집에서 지냈던 때를 제외하고는 결혼 후 이렇게 길게 있는 건 처음이다. 그땐 매일 아침 회사 가서 저녁 돼서야 돌아오니 한 달을 지냈다 하더라도 잠시 마주쳤는데, 프리랜서인 지금은 하루 종일 함께 있는다.


설 연휴에 부모님이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 푹 빠져있는 걸 봤었다. 그때는 ‘역시 부모님 나이 대는 트롯을 좋아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딴짓하면서 얼핏 같이 봤다. 홍잠언이라는 아홉 살 꼬마가 엄청나게 노래를 잘 불러서 그 장면만 기억에 남았다.



나도 ‘미스터트롯’ 입덕

2월 말, 코로나를 피해 부모님 집에 오니 부모님은 미스터트롯 열혈 팬이 되어있었다. 계속 재방송을 보고, 생방송하는 시간이면 미리 집안일을 모두 마치고 시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같이 본방을 보기 시작했는데, 나도 어느새 빠져들었다.


본방 끝나고 나면 유튜브에서 노래를 다시 들어보고, 멜론에 가서 검색해서 듣기 시작했다. 트롯이 이렇게 계속 듣고 싶은 노래였나 실감하면서 참가자들의 경연 노래뿐만 아니라 이전 앨범까지 찾아 듣게 됐다. 참가자 그룹이 유소년부, 신동부, 직장인부, 대디부, 현역부 등이 있었는데 현역부는 트롯 가수로 활동하고 있어 앨범이 있기 때문이다.


최종 2위를 한 영탁이 결승무대에서 부른 '찐이야'는 이미 주요 음원사이트 실시간 종합 차트 50권에 들기도 했다(3월16일 기준이니 앞으로 더 올라갈 듯).

요즘 내 플레이리스트



결승전 하던 날, 엄마와 아빠는 5만 원 내기를 했다. 아빠는 영탁한테, 엄마는 임영웅한테 걸었다. 나는 뒤늦게 이찬원의 ‘진또배기’를 듣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놀라 이찬원이 1등 할 거라 예상했다. 5만원의 주인공은 엄마였다.



다양한 연령대 팬 층 갖게 된 트롯 가수들

평범한 대학생으로 참가한 이찬원을 검색해봤더니, 방송 후 이미 엄청난 팬 군단이 있었다. 대구가 지금 코로나 위험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찬원 부모님이 대구에서 운영하는 막창집을 찾아가 유튜브 먹방을 찍어온 사람도 있고 팬들이 제작한 굿즈까지 있었다.


지금은 '미스터트롯'을 검색하면 '미스터트롯 화보집'이 자동 완성된다. 중고등 소녀팬들이 아이돌 응원하듯 짤을 만들어 올리기도 하고, 어디서 찾았는지 과거사진을 모아 만든 영상들도 있었다. 이찬원이 과거 SBS <스타킹>에 트롯신동으로 나왔던 영상이나 전국 노래자랑 참가 영상들은 이미 ‘성지순례 영상’이 됐다.


어렸을 때 ‘울산 이미자’로 <스타킹>에 나왔던 김희재는 해군 병장이 되어 해군복을 입고 경연에 참여했는데, 십 대 팬들이 그의 성장 과정을 모아 만든 영상들도 인기다. 소녀팬들은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한 김희재가 춤을 잘 춘다며 ‘춤 선을 봐야 하니 얼굴 직캠 말고 전신 직캠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나는 ‘직캠’이라는 단어도 미스터트롯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외에도 미스터트롯을 통해 10대가 쓰는 신조어나 줄임말을 알게 됐다. ‘좌’는 좋아라는 뜻이고, 욕인지 알았던 ‘씹덕’은 귀엽다는 뜻이라고 한다.


40대 참가자였던 장민호는 20대 초반에 아이돌 가수를 하다가 여러 번의 실패 후 트롯 가수로 활동하던 중 이 대회에 참가했는데 지금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유튜브 댓글엔 ‘저 15살인데 오빠 너무 멋져요’ 같은 댓글이 달린 걸 보고 새삼스러웠다. 중학생이 40대 초중반의 트롯 가수를 좋아하다니.


‘트롯’이라는 장르를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가 즐기는 걸 보니 정말 신기했다.


마지막 최종 경연 점수엔 대국민 문자투표도 포함됐다. 문자투표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는 네이버 검색창에 '임영웅'을 쓰더니 ‘이렇게 투표하면 되는 거야?’ 물었다. 아빠도 똑같이 네이버 검색창에 '영탁'을 썼다. 문자 투표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참여할 정도라니 어마어마하다.



그 날의 문자 투표수는 무려 773만 1천781 콜(유효 투표수는 542만 8천900표)이었다. '프로듀스 101'시리즈의 콜 수가 100만 대였던 걸 감안하면 7배가 넘는 대단한 수치다. 엄청나게 몰린 투표수로 서버 과부하가 발생해 우승자 발표가 미뤄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최고 시청률이 35.7%이라니 정말 놀랍다.


엄마는 “OO엄마도 임영웅 뽑았다더라” 하면서 “생전 이런 거 안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문자 투표한 거 보면 진짜 얼마나 많이들 했을까?”라며 계속 미스터트롯 이야기만 한다.


코로나로 힘든 일상에 위로가 된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매번 방송 중 하는 말이 있었다. ‘코로나로 우울한 일상에 우리가 힘이 되면 좋겠다’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외출 한 번 하기 힘든 요즘, 목요일이 기다려졌고 방송이 끝나고 나면 집에서 유튜브나 멜론으로 노래를 다시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엄마가 갑자기 유튜브를 활발히 시청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미스터트롯 덕분이다. 심지어 마지막 우승자 발표 생방송은 엄마가 일이 있어서 외부였는데, 유튜브 실시간 라이브로 시청했다고 한다. Top7에 든 참가자들이 ‘무조건’을 개사해 코로나 퇴치송을 부르기도 했는데, 부모님은 그걸 신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앞으로 미스터트롯 관련해 정말 다양한 콘텐츠가 파생될 거 같다. 유튜브 영상부터 굿즈, 화보집, 콘서트까지. 이미 대부분 기획 중인 듯하다.


최근 꾸준히 본 프로그램이 5년 전의 <응답하라 1998>과 최근 방영한 <동백꽃 필 무렵> 2개뿐일 정도로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이 정도 빠졌으니 콘텐츠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고 느꼈다. 생방 보면서 참가자의 다른 스토리가 궁금해져서 유튜브를 보게 되고, 다양하게 변주된 유튜브 영상들을 보니 생방이 기다려지고, 생방을 보고 나면 아쉬운 마음에 영상을 또 찾아보거나 멜론에서 음악을 듣고.


엄마는 벌써부터 다음 제2대 미스터트롯을 기다린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가족 3대가 함께 즐기게 된 트롯

코로나 때문에 우울하지만 미스터트롯 덕분에 즐거웠다. 거실에 모여 앉아 생방과 재방을 함께 보고, 식사 시간에 이렇게 활발한 대화가 오고 간 게 정말 오랜만이다.


본선 초반에 탈락한 싱글대디가 "사별 후 홀로 사춘기 자녀를 키우다 보니 소통이 힘들었는데, 미스터트롯 전에 한 <미스트롯>을 보면서 공감대가 생겼다"며, "아빠도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참여했다"고 했었다. 사춘기 자녀와의 공감대가 트롯이라니, 미스터트롯만큼은 아니지만 미스트롯도 대단했구나.



엄마가 ‘할머니 따라 해 보라’며 영탁이 결승전에서 부른 ‘찐찐찐찐 찐이야~’를 불러주니 아들이 춤을 추며 따라 했다. 3대가 즐기는 트롯이라니 신기하고 웃기다. 코로나로 놀이터조차 가지 못하는 요즘, 집콕 중 아들이 부르는 ‘찐이야’를 듣는 오후다.



* 사진 출처 - 유튜브 미스터 트롯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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