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회사를 떠난다

이 곳에서의 5년 후를 그려보고 퇴사를 결심했다

by 세실리아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임신부라는 이유로 자기 검열해야 했던 일, 회사에 수유실이 없어 복직 앞두고 단유 마사지를 받으러 다녔던 일, 전례 없던 육아휴직을 받기까지 힘들었던 일 등이 떠오른다. 혼자서만 버텨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임신기간 동안 받았던 고마운 일들도 많다. 동료들의 배려 덕분에 출산 열흘 전까지 무사히 회사 다니고 또다시 복귀해 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기승전 퇴사’지만.


고마운 기억 하나

만삭 임신부였을 때다. 사옥 이전을 앞두고, 모두 주말에 출근해 본인 PC를 설치하라는 공지가 왔다. 이걸 왜 휴일에 해야 하는 거냐며 다들 투덜댔는데, 나는 멀리서 통근했기 때문에 더 막막했다.

만삭이라 배가 산만했는데, 온몸 쪼그리고 앉아서 PC 선 연결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배가 땅기는 기분이 들었다. ‘PC 설치하러 갔다 하면 한나절 훌쩍 지날 텐데 진짜 싫다’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팀 후배가 “과장님 내일 나오지 마시고 쉬세요. 제가 해드릴게요” 했다. “그러면 너무 고맙지”라고 하고 싶은데 막상 입이 안 떨어져 2초 정적이 흐르자 후배는 “어차피 오는 김에 하는 건데요 뭐. 몸 불편하실 텐데 신경 쓰지 마세요” 하고 자리로 갔다.


월요일에 출근했더니 모니터며 키보드며 정갈하게 놓여있고, 전원을 켜니 바로 일할 수 있도록 세팅되어있었다. 이 친구랑 일하는 내내 후배복 있다고 생각했는데, 출산 전날까지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대리님, 임신 기간 내내 정말 고마웠어



고마운 기억 둘

'A팀 야간 행사가 있습니다. 지난주 B팀 행사에 지원 오지 않은 차장 이하 직원들은 전원 참석 바랍니다'

사측에서 공지했다. 저 행사에 지원 가면 퇴근 후 몇 시간 내내 추운 장소에 서있어야 한다. 당시 나는 초기 임신부였는데, “저는 임신해서 갈 수가 없어요”라고 하기엔 입이 안 떨어졌다. 직속 상사를 제외하곤 아직 ‘임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임신을 반기는 사내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 공지를 받고 임신 사실을 공개하기에 조심스러웠다.


병원에서 초기 유산 위험이 있다며 누워만 있으랬는데, 퇴근 후 몇 시간이나 서있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직속 상사였던 부장이 “내가 대신 갈까?” 했다. 일과 중 업무도 아니고, 퇴근 후(그것도 야근 수당 없이) 가야 하는 행사에 대신 가주겠다니.

부장님 덕분에 야간 행사에 동원되지 않고 퇴근했고, 병원에서 시킨 대로 퇴근 후 침대에 내내 누워있을 수 있었다. 부장님 정말 감사했어요.


'우리 팀 수익에서 A과장 인건비 빼면 남는 게 없다, B대리는 인건비 높으니 우리 팀에서 안 받겠다'는 이야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개인은 따뜻하고 다정한 곳이었다.



고마운 기억 셋

임신 말기, 회사에서는 내 자리를 백업할 인력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2개 클라이언트를 담당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K과장이 퇴사하며 내가 맡게 된 화장품 브랜드였다.


홍보회사엔 ‘클라이언트 운’이라는 게 있다. 그 화장품 브랜드는 매너 좋은 카운터파트, 적당한 업무량, 믿음직한 상사 등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은 되는 거 같았다. 내가 육아휴직에 들어갈 즈음 그 화장품 브랜드 전임자였던 K과장이 재입사했고,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내가 담당하던 두 개의 브랜드를 맡기로 했다. 나는 내심 ‘돌아와서 내가 저 화장품 브랜드 다시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담당자가 자주 바뀌는 걸 싫어한다. 홍보회사는 클라이언트의 수임료로 돌아가기 때문에, 내 복직 후 클라이언트가 담당자가 또 바뀌는 게 싫다고 하면 회사에서는 웬만하면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들어준다. 게다가 K과장은 그 화장품 브랜드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췄기 때문에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K과장이든 나든 누가 맡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저런 속내를 티 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먼저 출산을 경험했던 부장님은 내가 저런 걱정을 할 거란 걸 눈치챘던 거 같다. 인수인계 시기에 부장님은 클라이언트 담당자에게 농담인 듯 가볍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메일을 보내 뒀다.

“차장님께서도 잘 아시는 전임자 K과장이 C과장 휴직 기간 대체로 오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차장님과 초면인 다른 직원을 이 자리에 앉히려 했습니다. 업무 빠삭한 전입자가 이 자리로 오면 휴직 후 본인 자리로 못 돌아 올 까 봐 C과장이 걱정할까 봐요. 물론 전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제 노파심입니다 ㅎㅎ”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자 클라이언트사 책임자는 “부장님, 우리 브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K과장님이 공석을 메워주신다면 제 입장에서도 믿음직스럽고 좋습니다. 하지만 육아휴직 간 분의 자리는 당연히 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산휴가 기간 동안 K과장님이 잘 맡아 주시고 C과장님 건강하게 출산 후 다시 뵙길 바랍니다”라고 바로 회신을 보내왔다.


복직 후, 회사 사정상 그 자리로 배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상사였던 부장님과 클라이언트가 주고받은 메일은 내 기억에 아주 따뜻하게 남아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회사인데, 왜 떠나고 싶었을까?

임신과 출산의 고비를 지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보였다. 특정 시기엔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 직급이 높아질수록 그에 맞는 합당한 대우가 없는 회사의 문제 등을 보며 회사를 계속 다녔을 때 5년 후 내 모습은 어떨까 생각해봤다.


내가 퇴사를 고민하고 있던 그즈음, 대표는 종종 팀장급 직원들을 불러 '회사 규모에 비해 팀장이 너무 많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클라이언트 유치에 대한 압박을 했다. 내가 보기에 팀장들은 이미 맡은 일이 많아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유치할 여력이 없어 보이는데, 실적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우리 회사 팀장급은 다른 회사에 비해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퇴사를 종용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내 5년 후를 그려봤더니 딱히 희망적이지 않았다. 워킹맘으로 아등바등 더 버텨 얻을 수 있는 게 저런 모습이라면 지금 퇴사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게 좋겠다는 들었다. 그리고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가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다시 회사원이 될 경우의 수를 고려해봤을 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퇴사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정해진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아닌 새로운 형태로 일해보기로 하고, 오랜 고민 끝에 드디어 퇴사했다. 책상 정리를 하고 회사를 나서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세 번째 책상 정리다. 출산휴가 때 한 번, 육아휴직 때 한 번, 그리고 오늘. 앞선 두 번은 회사로 돌아올 것이 예정되어있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대학 졸업 이후 처음으로 회사원이 아닌 시간을 맞이한다. ‘주체적인 자세로 프리랜서의 문을 열어야지’ 다짐해본다.

애도 낳았는데 뭘 못하겠어! 그렇게 ‘프리랜서 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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