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프리선언 후 세운 원칙
드디어 퇴사하고 ‘프리 선언’을 했다. 아나운서들이야 프리랜서 선언이 언론에 도배되며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나 같은 평범한 회사원의 ‘프리 선언’은 그냥 혼자서 하는 선언이다.
퇴사 전부터 (1) 재택근무가 가능한가, (2) 유연 근무가 가능한가, (3) 내가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를 만족할만한 일이 있나 고심했는데, 저 세 가지를 충족하는 회사를 만났으니 일단 순조로운 출발이다. 이 회사는 나의 주 업무가 될 것이다.
이제는 ‘세컨드 레이어’, 즉 저 회사에서 기대만큼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완충 역할을 해줄 대비책을 찾을 시간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과외 선생님이었던 H언니는 지금도 내 인생 멘토인데, 반드시 세컨드 레이어를 마련하고 회사를 떠나라 했다. 미처 세컨드 레이어를 만들지 못했더라도 일을 하면서 꾸준히 기회를 모색해보라 했다.
(참고: 이 편에는 ‘세컨드 레이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메인 업무에 기복이 있더라도 타격이 크지 않도록 마련하는 대비책을 의미한다)
‘나 홀로 프리선언’을 하고 나서 세운 다짐은 두 가지다.
1) 프리랜서 시작 이후, 6개월 평균 수익이 회사원 시절 받던 월급보다 60% 이하라면 회사로 돌아갈 것
2) 그럴 일이 없도록 꾸준히 세컨드 레이어를 찾아볼 것
세컨드 레이어를 찾던 중 한 회사와 연이 닿았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페이를 제시했다.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미쳤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한편 ‘어차피 일 없는 날도 종종 있는데, 그때 틈틈이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화를 하려 해도 페이가 말도 안 됐다.
나에게 반드시 세컨드 레이어를 찾으라고 조언한 H언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프리랜서는 불안하니까 뭐든 해야지. 가릴 게 뭐 있어’ 같은 답정너 같은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H언니는 “이제 회사 소속도 아니고 오로지 네 이름으로만 일하는 프리랜서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페이로 이력을 남기는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시간도 많이 안 들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겸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다시 물으니 “그렇게 값어치 떨어지는 일을 하면 스스로 마모될 거야”라며, 차라리 그 시간에 취미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된 일에 집중할 힘을 기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듣고 보니 언니 말이 맞았다.
하지만 헤어지고 돌아서니 또다시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 결단을 못 내리고, 한 번 만나나 보자 하는 생각에 약속 시간에 그 회사로 향했다. 그 회사에서 “프로필 보니 업계 베테랑이시네요. 그런데 페이는 알고 계신 거죠?” 하는데 스스로 부끄러웠다. 내가 베테랑은 아니다만 어쨌든 10년 차가 되어가는데, 그 비용에 일하려고 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지금 나랑 미팅하고 있는 이 사람이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앞으로의 업무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하나도 집중이 안됐다. 일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이 돈 받고 일한다’는 사실이 더 스트레스 일 거 같았다. 게다가 내가 이 일을 하면 업계의 질서를 흐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이 일에 응하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페이 주는 일이 계속 유지 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낮은 페이로 일하는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거 같았다.
결국 그 일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엄청 무거웠다. 마치 대학교 4학년 때 면접보고 집에 가는 길처럼 몸도 마음도 지쳤다. 어리석은 욕심으로 미팅하느라 하루를 날리고, 초여름을 연상케 하는 더운 날씨에 불편한 복장으로 터벅터벅 걷는데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날 그 회사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 너무 지쳐서 한 카페에 들어가 일기를 썼다. 아래는 그 날 쓴 일기다.
1. 소탐대실하지 않기
내가 오늘 미팅한 그곳의 일을 했더라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는 메인 업무에 지장이 갔을 것이다. 또는 내 여가시간을 빼앗겨 스트레스받았을 것이다. 납득할만한 페이를 주는 곳과만 일할 것
2. 스스로 가치 높이기
H언니 말대로 낮은 페이에 일을 하면 스스로 마모되는 일이다. 그 시간에 책을 읽든 취미생활을 하든 업무 외에서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것
3. 나에게 일 주는 곳들에게 감사하기
일을 하며 받는 돈들을 ‘내 노동력으로 받은 돈’이니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미팅을 경험하고 보니 모두가 합리적인 비용을 주는 게 아니었다. 합당한 비용에 일을 맡겨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 갖고 일하기
4. 미래 생각하기
미팅 후에 회사를 나서는데 ‘만약 나한테 아무도 일을 안 준다면 저 페이 받고 일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빨리 변하는 업계 환경으로 내가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싶은 요즘이다. 업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 되기
공교롭게도 이 일기를 쓴 바로 다음 날, 업계 지인의 소개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어제의 경험에 비추어, 페이가 맞지 않으면 애초에 미팅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실례가 안 된다면 페이를 여쭤봐도 될까요?” 물었다. 내가 납득할만한 페이여서 긍정의 대답을 했더니 프로필과 레퍼런스를 메일로 보내달란다.
며칠 후 한번 만나보자는 연락이 왔다. 나 드디어 세컨드 레이어를 찾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