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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곰인형 23화

그녀를 깨운 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by 황규석


아침 출근길

버스에 오르면 먼저 어느 자리에

앉을까 눈치를 본다.

쭉 스캔을 하고 정하여 앉는다.

냉방이 잘 된 새 버스라면

문제가 없는데 오래된 소음이

심한 버스라면 앉는 자리와

위치에 운이 많이 작용한다.

그날 편안히 출근을 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새 버스라서 기분이 좋아 앉아

구석구석 만져보다가

설마 하고 안쪽에 손을 댔는데

말랑말랑 껌을 붙여

'여기는 내 자리였소'

라고 표시하는 현대의

언포게러블 위인을 만나면

정말 짜증에 더해 헛웃음이 새 나온다.

어느 자리는 토사물이 있어

멀쩡한 파란 좌석으로 피했더니

그 자리는 황당하게도

겉은 멀쩡한데 습기가 배어있어 바지가

초벌세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나마 출근길엔 외곽에 사는 나는 늦지 않는 이상

좌석 선택에 여유가 있다.

저 종점 부근에서 온 승객들은

여유 있게 자신의 자리에서

보통은 핸드폰 삼매경이다.


나도 괜찮은 자리가 남아

있어서 안쪽 자리에 앉았다.

물론 맨 뒷자리 앞의 독방

자리는 먼저 올라탄

그러니까 퇴근 때

제일 늦게

집에 도착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

참 신기하고 공평하다.

멀리 가는 사람들이

자리를 못 잡아도

출근길에는 좌석

우선권이 주어지니 말이다.

자리를 잡아 앉으면 이제부터는

누가 내 자리 옆에

앉느냐가 또 행복한

출근길의 필수요소이다.

사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제일 부담스러운 것은

역시 덩치가 크신 분들이다.

미안하지만 덩치가 크신 분들은

몸에 열이 많이 나서 땀을

아침부터 흘리면서 타는 경우가 많다.

작은 선풍기를 들고 있어도 말이다.

일단 이분들이 버스에 올라타면

먼저 안쪽에 앉은 승객들은

제발 내 자리에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물론 타는 사람도 피해가

덜 가게 고심해서 파트너(?)

를 고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일단 내 옆에 크신 분들이

앉으면 어깨가 움츠려든다.

다리 또한 좁히게 되어 금방 불편해진다.

엊그제 퇴근길에는

쩍벌남 할아버지가 계셔서 애를 먹었다.

그땐 차라리 서서 가는 게

좋은데 설 자리도 꽉 찼었다.

아, 저기 올라오는 분들이다.

이 분들도 나름 신경을 쓰는 게 보인다.

스캔을 하고 여성분은 주로 여성분

옆으로 남자 승객은 남자옆으로 가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조금은 보수적이다.

먼저 성큼 올라탄 키가 큰 여자는

저쪽으로 여자분에게 앉았고

키가 작고 여리 여리한 분이

내 옆에 마지못해 않았다.

좁게 가지 않아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금요일 출발이 좋았다.

역시나 보통체격의 내가

다리를 펴도 장롱하나가

들어올 만큼 여유로움을 느꼈다.

동행이 정해지면

안 보는 척 슬쩍 또 스캔을 한다.

나만 그럴까?

아닐 것이다. 정말 작은 체구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그리고 아, 내가 파란색

크록스 샌들인데 그녀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미색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거기다가 흰색 덧양말을 신고 있다.

나도 파란색 크록스를 신고

출근하고 있어서 묘하게

반갑고 동질감을 느꼈다.

난 양말은 신지 않고

바지에 넣고 있었서 볼품이 없었다.

그냥 어깨에 매는 가방에 넣고 다닐걸...


괜히 잃어버리지 않고

챙긴다고 손 가까운 곳에 두다니.

가방에 넣으면 될 것을

바지 주머니만 볼록하게..

아무튼 여리고 여린 가벼운 여자

직장인이 내 옆에 앉았다.

학생은 아니었다.

그녀가 얼마나 가볍냐 하면

보통 사람이 내 옆에

앉으면 의자가 물컹하고 움직이는데

너무 왜소하고 가녀린 몸이라

그런지 모기 한 마리가 앉은 것처럼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출근길 좌석 파트너로는 따따봉이다.

내 오른발을 바닥 벽면에 붙어 튀어나온

버스의 에어컨 라인, 전기 라인 케이블

박스에 올려 불안전한 자세를 만들지

않아도 좋았다.


기분이 좋아져서 헤헤하고

가는데 그녀의 고개가

바로 숙여졌다.

피곤힌지 바로 잠이 들었다.

마치 누에가 누에꼬치에 들어가듯이

아이가 자궁에 들어선 것처럼

작은 몸을 말아서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졌다.

죽은 듯이 잠에 빠진

그녀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핏기가 없었다.

여린 화장도 안 한 얼굴이었다.

여린 목 등의 솜털이 에어컨 바람에

미세하게 하늘하늘거렸다.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참 안쓰러웠다.

어느덧 내가 내릴 곳이다.

다다음 정거장이 내가 환승하는 역이다.


내가 내릴 준비를 했다.

몸을 일으키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저 다음에 내려요..."

반응이 없다.

"저기요... 여보세요...."

또 반응이 없다.

나는 그녀를 깨우기가 미안했다.

요즘 좀 몸무게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나는 통로 쪽 그녀의 누에가 된 몸을

다리를 들어서 허들 선수처럼

그냥 훌쩍 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맨 뒤에서

곰 아니 커다란 늑대 같은 덩치에

팔에 "착하게 살까 U?" 작은

파란색 문신을 하신 젊은 분이

통로로 나오면서

그 여자분을 "탁!"치는 게 아닌가.

난 이미 오른발을 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잠에서 깨어 그 남자를 피해

내 쪽으로 몸을 틀었고

나의 보드라운 아랫뱃살에 얼굴이 살짝!

옴마야... 찌릿!

"죄송합니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통과했다.


"......"

여자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이 볼품없는 아저씨를 싸악 스캔하고

다시 몸을 접었다.

엉거주춤하는 날

덩치 큰 젊은 분이 날 째려보길래

눈을 바로 깔고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상황이 정리되자

그 작은 분홍 테두리가 쳐진

크록스 흰색 샌들이 두 발을 모아

경계태세를 한 뒤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작았다.

딱 봐도 진짜 230 이하였다.

아마 흰 양말을 신은 이유는

작은 크록스 샌들이 없어서

작은 발이 헛돌까 봐

그런 것일 게다.


나는 환승 지하철역으로 내려가기 전에

떠나는 그녀가 탄 좌석을 보았다.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긴

딱 봐도 230 이하의 미색

크록스 샌들을 신은

그녀의 검은 머리가

다시 잠수함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미안해요... 곤히 자는데...

깨워서 제 잘못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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