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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곰인형 24화

여자, 곰을 만나다

by 황규석

장맛비가 퍼붓던 날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오다가

구멍가게와 양복집을 하는 부잣집 성규랑

구슬 따먹기를 가게 앞 평상에서 했다.

그 애가 자랑한

왕다마를 따기 위해서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하얀 사기다마와 무지개

구슬까지 으찌, 더비, 쌈으로 잃고 말았다.

기분이 확 잡쳤다.

그렇게 풀이 죽은 채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흐린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굵고 세차게 내리는 비였다.

머리와 등짝이 따끔거렸다.

집으로 뛰어와 녹슨 철제대문의 사자얼굴 손잡이를 두드렸다.

"쾅! 쾅! 쾅!"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아래 담뱃가게에서 왔다.

목에 멘 지갑으로 열쇠를 꺼내 열었다.

문이 열리자 갑자기 커다란 검은 물체가

집 안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산발한 머리가 마치 곰 같았더.

깜짝 놀라 난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치마를 입은 모습인데 메케한 냄새가 나는...

곰... 같은 여자 곰이었다.

장독대의 된장독과 고추장독이 열려있었다.

할머니가 서둘러 장독대를 닫았다.

넝마주이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보긴 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로는 여자 비렁뱅이

지금으로 말하면 여자 노숙자는 처음이었다.

잠깐 마주쳤던 그 퀭한 그리고 초점 잃은

눈 빛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할머니도 어머니에게 문단속을 잘하라고

싫은 소리를 들었고 나도 열쇠를 꼭 가지고

다니라고 꾸중을 들었다.

며칠 후 일이 없는지 어머니가 일찍 대문을

열고 공장에서 집으로 오셨다.

들어오시는데 문을 닫지 않았다.

내가 달려 나가 문을 닫으려는

그 여자 곰이 서 있었다. 무서웠다.

나는 또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뭐 해 , 들어와 어서...."

그 곰, 거리의 여자도 긴장한 듯 보였다.

어머니는 곤로의 불을 켜고 양은 곰솥에

물을 가득 담아 끓였다.


어머니는 부엌의 문을 닫고 김장할 때나

단수 때 물을 받으러 쓰는 큰 고무대야를

장광에서 꺼냈다.

나는 닫힌 부엌에서 썩은 고기 삶는 냄새와

찰박찰박 물소리를 들었다. 북북, 부욱... 북

이태리타월소리도 들렸다.

"아휴, 이 땟국물 좀 봐... "

나는 망을 보듯 또 호기심에 훔쳐보듯

그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할머니는 어디서 못쓰는 옷가지를 갈아입게 가져오셨다.

여자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목욕은 마친 곰은 아니고 사람으로 환생하였다.

어머니는 마루에 된장찌개가 올라간 밥상도 차렸다.

"걱정 말고 많이 먹어, 넉넉하게 싸줄 테니까 가져가..."

여자 곰이 히죽히죽 기분이 좋은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히히히~ 히히"


"어쩌다 이렇게 됐누... 쯔쯔쯔... 어디서 봤어? "

할머니는 옆에서 그 여자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기 언덕 위 옹기집 담벼락에서 자더라고요. 그래서 깨워 왔어요."

어머니는 쌀과 김치 그리고 여분의

옷가지도 한 보따리 건네주었다.

"잘 살아... 알았지... 잘 살아야 돼"

마른장마 속에 오랜만에 비다운 비가

반갑게 내린다.


40년 전 그 집 없는 떠돌이 여자 곰은

지금 안녕할까....

안녕하길 부디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곰이 아닌 여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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