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눔 헌혈의 역사를 돌아보며...
6.25 전쟁은 남북 쌍방 간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주었지만 반대로 그로 인해 한국의 열악한 의학 수준, 특히 외과의학분야에 발전을 촉발시킨 계기다 되었습니다. 전상자들의 응급치료와 외과수술 경험이 그것이었습니다. 주한미군 의료요원들은 수혈을 통해 전상병들의 혈압을 유지시키면서 생명을 구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6.25 전쟁 당시 부상자 치료를 위해 사용된 혈액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공수된 것이었습니다. 미국 국민으로부터 채혈된 혈액은 한국군 부상자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군은 전상자 치료를 위해 수혈부 또는 혈액고(blood bank)를 설치했으나 매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간에서는 병원의 응급환자의 경우 환자의 가족이나 친척을 불러 혈액형을 비교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직접 수혈을 실시하였습니다. 그것도 힘든 경우 피를 구해오도록 보호자들을 설득해서 종합병원 근처에는 금전적 보상을 노리는 매혈자들이 배회하곤 하였습니다.
휴전 후 전시와 같이 미국의 공급이 힘들어지자 자체적으로 혈액은행을 설치 하라는 미국의 지원으로 1954년 6월 7일 서울 을지로 입구에 위치한 보건사회부 별관에 국립혈액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1956년 2월,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립혈액원에서 매혈을 하고 돌아가던 모 대학교 학생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반복된 매혈로 인한 만성빈혈을 사인으로 보고 사회문제화하였고 국립혈액원은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보건사회복지부는 세계 각국의 혈액사업 실태 조사와 혈액사업의 시행의 취지를 감안하여 혈액 사업을 대한적십자사로 이관하기로 결정했고 국립혈액원의 시설과 장비를 인수한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이 1958년 2월 15일 발족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혈액 확보 방법은 대부분 매혈이었고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습니다. 1950년대에는 매혈 대가로 1병당 1,000 환이 지급되었습니다.
4·19 혁명은 1960년 부정선거를 계기로 시작된 민주화 운동으로,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시민과 학생들의 참여가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위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당시 보건사회부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4월 19일 하루 동안 186명이 사망하고 31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의료 현장에서는 급격히 늘어난 수혈 수요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급박한 상황에 병원 직원, 의대생,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헌혈에 나섰습니다. 다행히도 다음 날인 4월 20일 새벽,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시민과 학생들이 자신의 피를 나눠주겠다며 병원으로 모여들었고 외국인들까지 헌혈을 하겠다고 찾아와 혈액이 부족한 부상자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당시 적십자혈액원도 62명의 학생들로부터 헌혈을 받아 서울시내 병원에 공급하였는데, 당시 하루에 62명으로부터 헌혈을 받은 기록은 그것만으로도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4·19 혁명을 계기로 헌혈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까지는 혈액을 사고파는 ‘매혈’에 의존해야 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혈액을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위급한 상황 속에서 서로를 돕기 위한 시민들의 행동은, 우리나라 헌혈 문화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헌혈 문화를 만들어 가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헌혈 분위기가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매혈 당시에는 '쪼록'. '댑방'이라는 용어가 있었는데 '쪼록'은 매혈자를, '댑방'은 매혈자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깡패를 일컫는 은어였습니다. 병원외외도 곳곳의 비밀 혈액취급소의 저질 혈액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요가 늘어나 안정적 혈액의 확보에 순수한 헌혈운동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처음으로 '사랑의 헌혈운동'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헌혈운동을 시작했고 1960년 중반 이후 연세대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헌혈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제11회 세계재향군인연맹의 날인 1962년 6월 23일 세계헌혈운동에 발맞추어 대한재향군인회는 '평화를 위한 피'라는 슬로건아래 단체 헌혈을 진행하였습니다. 1963년 5월 1일부터 대한적십자사의 일종의 혈액보험제도와 같은 '혈액예치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480명이 혈액을 예치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1969년대 말에는 매혈 풍토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 민간 차원의 헌혈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 4월 1일부터 매혈을 일체 폐지하고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을 중앙혈액원으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헌혈의 저변 확대를 위해 최초의 헌혈의 집을 개소하였습니다. 여름철 헌혈 부족을 해소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고정된 장소에서 개인이 찾아오도록 저변을 확대하는 목표였습니다. 채혈도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직장인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1974년 매혈에서 헌혈로 전환한 첫해, 목표보다 넘어선 4만 8천여 명의 헌혈을 기록했습니다. 4만 명의 헌혈 목표를 세워 그동안 공급하던 혈액의 전략을 헌혈로 충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때 반대하거나 반신반의하던 의사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1975년 5만 3천여 명, 1976년 6만 8천여 명, 1977년 8만 4천여 명, 1978년 9만 7천여 명으로 헌혈자들이 늘었습니다.
1978년 정부는 전국 혈액사업의 80% 이상을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이 담당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8년 9만 7천여 명에서 1979년 17만여 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기본 정신의 토대를 인도주의에 두고 막강한 정부의 후광 아래 조직을 운영하는 적십자였지만 국민들의 의식이 워낙 미약한 풍토에서 헌혈사업의 성공적 수행은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은 점차 씻겨나가고 있었습니다. 군부대에서의 헌혈은 헌혈이 이슈로 대두된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확산되었습니다. 1966년 6월 파월장병을 위한 헌혈 캠페인에 한양공고 학생 87명의 헌혈이 전쟁터에 보내졌습니다. 국방부는 1973년부터 매혈로 충당해 온 군의 혈액을 헌혈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 10월 헌혈예치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헌혈된 혈액의 사용권을 헌혈자에게 주는 것으로서 헌혈증서를 제시하면 전국 어느 곳에서나 혈액을 찾아 쓸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헌혈자에게 언제든 본인에게도 헌혈의 나눔은 물론 필요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는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1975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을 통해 공급된 혈액이 수혈받은 여러 환자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심한 부작용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불량 채혈병 때문이었습니다. 헌혈 운동은 이 사건으로 타격을 입었으나 혈액 사업이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게 하였습니다. 병 대신 플라스틱백으로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오염 사건을 계기로 매혈을 헌혈로 전환하고, 시설을 보강하고 간염 및 매독검사 등을 혈액의 안전을 강화하였습니다.
1982년 1월 20일 KBS의 전국적인 헌혈캠페인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매년 TV와 라디오로 헌혈 공익광고를 제작하여 헌혈의 저변 확대를 이루었습니다. 종교 단체의 헌혈 캠페인도 1980년대 이루어졌습니다. 1984년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1985년 조계종 100만 불자, 1989년 천주교 헌혈잔치가 그것입니다. 1987년 7월부터 인간면역결핍증 바이러스(HIV) 항체검사를 실시하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 선진국에서는 수혈의 90% 이상이 성분 수혈이었으나 1981년 당시 3%를 넘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성분 수혈은 환자에게 필요한 혈액성분만을 수혈함으로써 치료효과를 높이고 수혈로 인한 부작용을 줄이면서 혈액 이용의 효율성도 높이는 수혈요법입니다.
1989년 대한적십자사는 혈액제제연구소(현 혈장분획센터)를 발족하고 1991년 7월 분획동을 신축하였습니다. 1994년부터 모든 혈장분획제제의 국내공급(수입 포함)을 비영리 기관인 대한적십자사가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산소와 영양소의 운반이나 면역 등의 역할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혈액은 유형 성분인 혈구(적혈구, 백혈구)와 액체 성분인 혈장으로 이루어집니다. 액체성분(혈장)에는 다양한 단백질 성분이 녹아있는데 이를 분리하여(분획) 만드는 치료용 의약품으로 알부민, 면역글로불린, 항응고제 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헌혈에는 모든 혈액 성분을 채취하는 '전혈 헌혈'과 혈소판과 혈장을 채취하는 '성분 헌혈'이 있는 것입니다. 성분 헌혈은 헌혈한 사람에게 적혈구를 되돌려주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성분 헌혈의 확대를 통해 혈액의 낭비적 요소를 없애는 일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군인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군부에 맞서 용감히 저항했습니다. 5월 27일까지 이어진 이 항쟁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다치고, 고문과 투옥을 당했습니다.
열흘 동안 최소 15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80명 이상이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이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자발적 헌혈로 피로 지킨 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연대가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긴급 의료진을 파견했지만, 당시 광주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이후 5월 24일, 혈액과 약품을 들고 다시 광주에 들어갔지만, 그보다 앞서 부상자들을 돌본 것은 다름 아닌 광주의 시민들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고, 교과서에 이를 수록하며 국가 차원의 기념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이 잠든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항쟁의 현장은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혈에 나섰던 광주의 용기 있는 손길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한 방울의 혈액은, 그날의 헌혈 정신을 잇는 작지만 위대한 실천입니다. 시민들이 보여준 연대와 생명 존중의 가치는 지금도 헌혈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최근에는 그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후에 1994년에 일어난 대구 도시가스 폭발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예기치 못한 대형 재해는 커다란 슬픔이고 비극이었지만 그때마다 국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앞다투어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세계헌혈자의 날은 국제 헌혈운동 관련 기관(국제적십자사연맹, 세계보건기구, 국제헌혈자조직연맹, 국제수혈학회)이 지난 2004년 제정한 세계 헌혈자의 축제로 ABO혈액형을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박사의 탄생일인 6월 14일을 기념하여 제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헌혈의 중요성을 알리고 국가 차원에서 헌혈자 예우강화를 위해 혈액관리법을 개정(2021.12.)하여 매년 6월 14일 헌혈자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세계헌혈자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매혈을 지양하고 자신의 혈액을 무상으로 기증하여 생명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헌혈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날입니다. 세계 각국에서는 2004년부터 헌혈문화 확산과 헌혈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대한적십자사도 2004년부터 매년 6월 14일을 기념하여 헌혈자를 위한 축제의 한마당인 세계헌혈자의 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발췌와 인용, 참고자료>
1. 1958-2018 생명나눔의 발자취(혈액사업 60년) - 발행 대한적십자사 2018,
2.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공식 블로그
3. 대한뉴스 929호
연세대학교에서는 학생 헌혈운동을 벌여 닷새 동안 250,003의 혈액을 채취했습니다. 금은보화는 내게 없어도 젊은 피는 있다는 표어를 내걸고 학생들 스스로가 벌인 이 헌혈 운동에 교수들과 일반인도 적극 참여했습니다.(대한뉴스 9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