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한 발 비껴 서서 가볍게 뛰어본다

by 황규석
2024.06 대전


큰일이 있었는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작년 6월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대학 병원에서는 이런저런 검사를 더 해보라고 했다. 장남 역할을 해야 하는 저는 반대를 했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습니다. 그냥 집에서 돌보겠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처음엔 3개월을 이야기하다 나중엔 한 달로 말을 바꿨습니다. 애초에 이야기를 그렇게 해주지 병원에서 나간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겁을 주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더 이상 그렇게 낫지도 않는 병에 돈을 쓸 만큼 우리 형제들도 넉넉하지 않아서 제 말에 쉽게 수긍을 했습니다. 십수 년째 살았나 죽었나 연락이 안 되는 형님 빼고 누나도 남동생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요.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토요일 병원에서 아버지를 택시에 태워 모셔 오는데 아무것도 못 움직이는 아버지가 그리 원망스러웠습니다. "좀 움직여봐요, 아니 바로 앞 택시도 못 타면 어떻게...." 결국은 나를 향한 화풀이였습니다.


병원에서의 마지막 날은 제가 아버지 침대 옆에서 같이 잠들었습니다. 기저귀를 한번 갈고 소변통을 댔는데 소변이 안 나왔습니다. 감사하게도 아버지는 집에 와서 한 달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야, 아버지가 안 움직인다"는 어머니의 전화는 비 오는 토요일 오후에 받았습니다. '일상공감'이란 주제의 첫 개인 사진전을 열었던 충무로의 작은 갤러리 카페에서였습니다. '뭐를 해야 하지?' 멍해졌습니다. 카톡 부고장은 고향에 있는 남동생이 만들어 보내주었습니다.

가족 부양을 위해 배운 게 없어서 택시 운전을 하셨던 아버지는 참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4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버지도는 일본에서 태어나 당신의 아버지도 어렸을 때 일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정을 당연히 못 받았으리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전 돌아가진 할머니를 만나 지금 쯤 종종 막걸리를 한잔 하시겠지요. 당신의 바로 아래 누이동생은 할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자 20대 꽃다운 나이에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누이도 만나고 미국 이민 가서 거기서 돌아가신 여동생도 만났겠네요.


그러고 보면 죽음은 또 다른 만남인듯합니다. 우리 가족은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4~5년 앓다가 90이 되셔서 가셨으니 호상이면 호상이었죠. 식구들 부담 안 주려고 일찍 길을 떠나신 것 같아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장례식장은 조용했습니다. 손님도 많지 않아 한산했고요. 모처럼 못 보던 얼굴 보니까 좋았어요. 집사람은 우리 집 강아지랑 한가할 때 밖에서 좀 뛰어놀았습니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이 기억 속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잠깐 비껴 서서 돌아보는 여유, 그것이 우리가 슬픔 아니 이별을 대하는 자세인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떻게 우리는 한 지붕 아래에 모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