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희은 -
막걸리를 흔들고 돌려 종이컵에 나누어 마시고 꼭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선배의 선창으로. 대학 도서관 잔디 광장 앞에서 음악당 앞에서 둘러앉아서. 또 커다란 별관 강의실 바닥에서. 책상을 치우고 빙 둘러앉아 숙연하게 불렀던 노래다. 동기 친구들끼리 그리고 선배 몇 명과 불렀을 때와는 달리 과 연합 M.T를 가서는 모두가 목청껏 불렀던 노래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그냥 첫마디부터 왠지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울분과 함께 숙연한 마음도 일어났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제대로 된 소 식을 들을 수 없었다. 정보가 한정되고 약한 아직 꼬마로서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모르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반란처럼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 군인이 죽었다고만 들었다.
대학에 가서 그날의 사진과 이야기를 대자보를 통해 보고 듣고 서서히 깨우칠 수 있었던... 그리고 88 서울 올림픽 꿈나무 학번으로 몇 번의 시위에 따라 나갔다. 백골단을 피해 골목으로 치약을 묻힌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교문 밖을 나가고 또 달려들고 도망을 쳤다. 최루탄 냄새에 익숙해질 때 난 군대에 자원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올림픽이 열릴 때 내가 전방에 가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정 형편상 대학생 등록금도 부담스러웠다. 음대에 다니는 누나가 있었고 곧 제대하고 복학해야 하는 형, 우리 집의 장남이 있었기에. 군에 들어가서 더 이상 '아침이슬'을 부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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