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붕어빵 노점을 시작하며 크게 틀어놨던 희망의 노동요
제25화 페스티발
- 엄 정 화 -
토요일 낮부터 종일 비가 왔다. 오전에 내시경을 하고 와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가 딱 맞았다. 가을비가 오고 나니 날이 더 으슬으슬해졌다. 이맘때면 평소에는 안 보이던 붕어빵 노점이 하나둘씩 거리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도 희미한 버스 정거장 부근 포장마차 아래서 따끈따끈한 붕어빵을 기다린다. 요즘은 크림빵도 있고 종류도 참 다양하다. 물론 가격도 많이 올라서 보통은 3개 2천 원이 기본인 것 같다. 한 개에 천 원짜리도 많이 있는 거 같고 나 때는 25년 전에는 보통 5개에 1000원이었다.
이 겨울의 붕어빵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영화를 한다고 했는데 만드는 것은 아니고 감상과 이야기를 하는 시네마테크 사무실을 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비디오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오래 끌고 가지는 못했다.
선화동 교보생명 옆 건물의 지하에 아는 형님의 도움으로 월세 없이 지내다가 반년 만에 이사를 가야만 했다. 도청 앞 중부 경찰서 대흥동 안쪽으로 한 낡은 건물의 5층은 보증금 50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 23만 원을 냈다. 건물 옥상에 덩그러니 있는 작은 사무실 그러니까 옥탑방 사무실이었다. 여기도 1년 6개월 정도 꾸려나갔었나 보다. 월세 부담으로 거기를 나와 영화세상 회원의 ‘토마토 공격대’라는 컬트 영화의 제목을 딴 카페에 이사를 갔다.
영업을 하는 곳이라 불편해서 이곳도 나와 둔산의 정부 3 청사 맞은편 선사유적지 공원 담벼락이 가깝고 2개의 상영장이 있는 선사 시네마라는 곳에도 사장님과 이야기를 해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아래층 지하 2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다. 각종 잡지와 비디오 테이프, 비디오 장을 정말 힘들게 들고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래도 매달 회지를 냈다.
그리고 그 이후 옮겨 간 곳이 바로 극단 예사랑이라는 작은 지역의 극단이었다. 주연으로 한 작품 <그녀의 초상>이란 작품이었다. 그리고 다른 연극 작품의 스텝이 되었고 연기에도 꽤 소질이 있다고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다음 작품으로 지역의 큰 극단과 연합으로 ‘미친 세상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라는 뮤지컬 공연을 준비했다.
몸을 만드는 재즈댄스부터 발성을 키우는 호흡법, 그리고 합창까지 음악 스텝까지 20여 명이 넘은 많은 인원이었다. 배우들과 같이 지하에서 밥을 해 먹고 연습을 했다. 재즈댄스 선생님으로부터 춤을 배웠는데 우선 몸을 만들어야 했다. 뻣뻣한 몸으로 다리를 찢으려니까 정말 힘들었다. 다시 단증을 따려고 몸을 만드는 데 군입대 신병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3~4개월을 연습을 늦게까지 했다. 난 중간에 뮤직비디오 영상을 또 찍어서 빔 프로젝터로 보여주는 영상도 준비해야 해서 더 바빴다. 그리고 공연을 했는데... 나름대로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음악도 지역 음악가 만든 창작곡이었고 나름 격렬하게 춤도 추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연극으로 수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표를 팔아서 자기 수입을 하라는데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저 지인들에게 초대권을 나누어 주고 밥을 한 끼 얻어먹는 정도였다. 6주 정도의 지하 소극장 뮤지컬 공연이 끝났다.
내가 연극배우인가 아니면 영화를 하려는 사람인가 그런 본 캐릭터의 혼란이 올 때쯤 생활고가 찾아왔다. 연세가 드신 할머니는 치매가 심해지시고 일을 안 하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사는 내가 뭐라도 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우리 시네마테크 컬트 회원 중의 형님 한 분이 전문대 앞에서 학생 주점과 식당을 하고 계셨는데 가게 이름이 3학년 4 반인가 그랬다.
그 형님이 떡볶이 장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 형님은 내 소개로 영화를 만들고 독립영화 협회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그 형님이 안타깝게도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길 들었다. 여하튼 그래 뭐라도 해보자 하고 나도 결단을 내렸다. 오래 망설였다. 지하 극단 앞 이면도로에는 패밀리 마트 편의점이 있었다.
거기서 하면 자리를 차지한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겠지. 그런데 시작할 돈이 없었다. 그때 같은 극단에 있던 동생이 나에게 돈을 백만 원을 꾸어주었다. 지금은 그 친구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 그 친구는 그때 연극을 하면서 유성의 룸 싸롱에서 웨이터를 하고 있어서 그래도 형편이 좀 나은 친구였다.
그래서 그가 빌려준 돈 100만 원을 가지고 작은 노점상용 포장마차를 하나 구입했다. 그런데 포장마차는 트럭으로 배달을 받았지만 장사를 할 재료비를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돈을 좀 더 꾸었다. 재료는 거기서 포장마차 제작 공장에서 주문을 하면 가져다준다고 했다. 포장마차에는 붕어빵틀이 있었고 어묵을 끓이는 통과 떡볶이 판이 있었다. 닭 염통 꼬치도 인기가 있다고 해서 같이 재료 주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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