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거북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지만 걸을 수 있음에 행복했던 하루

by 황규석

제30화 빙고

- 거북이 -


서울에 올라와 독립영화 워크숍을 우여곡절 끝에 마쳤다. 3개월의 과정이니 졸업작품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료 작품을 만들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는 ‘주말의 명화’였는데 팀원의 의견을 반영하다니 보니 작품은 별로 주목을 못 받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고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엉성한 어정쩡한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알음알음 단편영화를 만드는 친구들을 도왔다.


그런데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미래가 창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같이 작업한 작품이 각종 단편 영화제에 선정되어 상영되고 수상하면 좋은데 그렇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무슨 잡지인가에서 본 모임이 ‘뚜벅이의 길’이란 걷기 모임 동호회였다. 그리고 경향신문 매거진 X라는 코너에도 모임 소개가 나왔다. 다음 카페라는 것도 난 처음 알았다.


큰돈도 필요하지 않고 그냥 걷는 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 같이 오래 걷는다는 것이 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모임에 가입을 하고 수원 화성을 걷는 모임에 나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모여 비 오는 수원 화성 행궁을 걸었다. 나도 처음 가본 그곳. 도심 속 낮은 성벽과 고즈넉함. 수줍게 말을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간단히 밥을 먹고 헤어졌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대 초 혈혈단신 상경을 하였고 단편영화 작업을 배우고 시작했다. 그리고 독립영화협의회에 소속되어 독립영화발표회를 진행하였다. 홍릉의 영화진흥위원회 그리고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지하, 두타 등에서.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의 프로듀서도 맡았다. 10여 편의 단편영화의 스텝으로 참여했으나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좀 지친 상태였다. 그때 내 지친 내 마음에 휴식처가 되고 활기가 된 모임이 바로 뚜벅이의 길이란 모임이다. 아마 2003년 봄에 첫 모임을 나갔던 걸로 기억난다. 난 곧 이 모임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이 아쉬워 내가 번개 모임을 하기도 했다. 많아야 10명 내외 작게는 3, 4명도 모이는 모임은 소박하고 즐거웠다.


우리는 만나면 같이 걸었다. 그저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만원 정도 걷어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그해 겨울인가 난 이천의 설봉공원에 가자는 번개 모임을 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이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 아마.


갑자기 이천에 왜 갔냐면 거기 내가 아는 사람과 같이 가보았기 때문이다. 터미널에서 가까운 설봉공원은 나지막하니 걷기에 딱 좋고 시외로 바람을 쐬러 가자는 의미였다. 그래서 5명인가 6명이 모였다. 공원에 갔는데 그때 산이라 눈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 산자락을 끝에서 무슨 마대 자루인가를 주워 내 권유로 우리는 눈썰매를 탔다. 우리 걷기 회원들이랑. 처음엔 머뭇거리던 친구들도 한번 타보니 너무 재밌는 거라 여러 번 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탔다. 또 엎어지고 깔깔대고. 난 끄적끄적 거리는 걸 좋아해서 집에 와서 늦게라도 인터넷 카페에 후기를 또 정성스럽게 썼다.


그래서 내가 쓴 글에는 조회 수가 많고 댓글도 많이 달렸다. 그래서 내가 주관하는 모임은 꽤 인기가 있었다. 그날 저녁 그때 찍은 사진을 연속으로 붙여 음악을 깔아 동영상처럼 보이게 했다. 그게 아직도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썼던 글은 "참외배꼽의 걷기 일기장"이란 책으로 만들었다.


그때 배경음악으로 깐 노래가 바로 이 거북이의 ‘빙고’였다. 리더인 남자와 여자 2명이 부르는 노래인데 아주 경쾌하고 신나는 노래였다. 어둡고 칙칙한 현실을 덮어주고 또 용기를 주는 노래 가사였다. 일단 리듬이 아주 신나서 들썩거리게 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가 바로 빙고다. 아쉽게도 리더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대중가요의 너무 소중한 인재가 사라져서 지금도 안타깝다.


그때 이 음악과 함께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던 뚜벅이 친구들은 지금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분명히 건강하게 누군가의 아내로 남편으로 건강하게 살 것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걷기 모임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서울 생활의 재미를 찾게 된 그 시절 30대 중반의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어찌 보면 가사대로 산다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내 환경과 처지를 비관하지 말고 웃으며 살아가라는 이야기. 산자락의 마대 눈썰매를 타고 미끄러지며 그때 우리도 정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 노래는 그냥 경쾌한 음악만 있어서 흥겨운 것이 아니라 가사가 주는 희망과 용기에 더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슬럼프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가 영화를 한다고 했는데 워크숍을 끝나고 동기 3명과 프로덕션을 만든다고 잠깐 의기투합했었다.


하지만 곧바로 서로 맘만 상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독립영화발표회를 진행하며 여러 사람의 단편영화의 작업을 서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중에 명동의 국립 영화아카데미 학생의 졸업작품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의욕을 보였지만 작품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하여 의기소침하던 상태였다. 영화가 잘 되어 영화제에 상영이 되면 내 이력에도 도움이 되는 데 그것도 잘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영화작업도 지지부진했다. 내가 돈을 모아둔 게 없어서 내 돈으로 영화를 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다음 카페 "뚜벅이의 길"(현 세상 걷기) 걷기 모임에 참여해서 부담 없이 걷고 사람을 알게 되고 또 그 이야기를 카페에 쓰고 공감을 얻고 또 신나게 모임을 만들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리고 이천 설봉공원 잔설에서 눈썰매를 타는 사진을 엮은 음악이 이 거북이의 ‘빙고’였다. 이 밖에도 나는 거북이의 노래 모두 좋아한다. 자칫 우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즐거운 기운과 행복을 전해준 노래였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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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눈물 많은 걷기 중독자. 복종에 익숙한 을. 평생 을로 살아갈 예정. 전 영화세상, 대전 씨네마떼크 컬트 대표. 전방위 무규칙 잡종 글쓰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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